OPEN STAGE

gallery R
서울특별시 성동구 광나루로 294 성동세무타워 B01호
TEL 02-6495-0001
e-mail galleryrkr@gmail.com

2023년 3월 25일 - 4월 22일
작가와의 대화 : 2023년 4월 1일(토) 오후 3시

전시오픈 : 매주 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오픈시간 : 오후 1시부터 7시까지
전시휴관 : 매주 일요일, 월요일

전시기획 : 갤러리 R 객원큐레이터 류병학

작가 장경국은
1994년 영남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를 졸업했다. 그는 1994년 미대 졸업과 함께 백아갤러리에서 대구의 경북대, 계명대, 대구대, 영남대, 효성여대 등 당시 미대 졸업생들 중 유망작가를 선정하여 기획한 『신인전』에 초대되어 출품한다.

2003년 그는 대구문화예술회관에서 열린 『채널14-人(CH14-人)』에 초대된다. 2009년 그는 미그라미(GMIGRAMI)가 주관하고 큐레이팅 컴퍼니 에이치-존(H-zone)이 기획을 맡아 서울무역전시컨벤션센터(SETEC)에서 열린 『코리아 투머로우(KOREA TOMORROW)』에 초대되어 작품들을 출품한다.

2010년 그는 강남구 청담동에 새롭게 문을 열게 된 갤러리 페이스(gallery FACE)의 개관전 『한국현대미술의 지평』에 초대되어 출품한다. 2014년 그는 갤러리전의 기획전 『예술촌의 발견』, 2016년 갤러리H의 기획전 『부창부수(夫唱婦隋)』에 초대된다.

장경국은 2007년 대구문화예술회관에서 매년 선정하는 『2007 올해의 청년작가전』에 선정되어 첫 개인전을 개최한다. 하지만 그는 13년간 긴 침묵을 한다. 2019년 독립큐레이터 류병학은 두 차례의 장경국 개인전을 기획한다. 서울 세컨드 에비뉴 갤러리의 장경국 개인전 『오프스테이지(OFFSTAGE)』와 대구 동원 갤러리의 『온스테이지(ONSTAGE)』가 그것이다.

따라서 이번 갤러리 R에서 열리는 장경국 개인전 『오픈 스테이지(OPEN STAGE)』는 ‘스테이지’ 3탄이 되는 셈이다. 물론 이번 그의 개인전도 갤러리 R의 객원큐레이터인 류병학 씨가 기획했다. 장경국은 이번 갤러리 R의 개인전에 2018년부터 최근까지 작업한 신작 50여 점을 선보인다. 그의 작품 소장처는 대구미술관과 대구문화예술회관 그리고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은행 또한 개인 컬랙터들이 있다.

장경국의 ‘오픈 스테이지(OPEN STAGE)’

장경국은 2019년 세컨드 에비뉴 갤러리의 개인전 타이틀을 『오프 스테이지(OFFSTAGE)』로 명명한 반면, 동원갤러리 개인전 타이틀은 『온 스테이지(ONSTAGE)』로 작명했고, 이번 갤러리 R 개인전 타이틀은 『오픈 스테이지』로 적었다.

여러분께서 더 잘 알고 있듯이 영어 ‘스테이지(Stage)’는 연극에서 ‘무대’를 뜻한다. 물론 스테이지는 영화 제작 공정상의 배경이나 무대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리고 제작 공정에서 한 단계가 끝나고 다른 다음 단계로 옮아갈 때 ‘스테이지’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소설의 3요소로 인물과 사건 그리고 배경을 꼽는데, 인물이 캐릭터를, 사건은 스토리를, 배경은 스테이지에 해당한다.

‘온 스테이지’는 ‘무대 위에서의’ 혹은 ‘관객 앞에서의’를 뜻하는 반면, ‘오프 스테이지’는 (관객이 안 보이는) ‘무대 뒤에서의’ 혹은 ‘무대 밖에서의’를 의미한다. 영화에서 ‘오프 스테이지’는 스크린에 보이지 않는 부분을 의미한다. 그런데 오프 스테이지는 관객의 눈에 보이지 않지만 관객이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따라서 관객은 (목)소리를 통해 보이지 않는 인물을 상상하게 될 것이다.

장경국의 ‘오프 스테이지’가 무대 뒤/밖의 ‘사건’을 표현한 것이라면, 그의 ‘온 스테이지’는 무대 위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그의 ‘오픈 스테이지’는 무엇을 표현한 것일까? ‘오픈 스테이지’는 객석이 3면으로 둘러싸인 무대를 뜻한다. 따라서 그것은 무대와 객석을 일체화시킨 일종의 ‘개방 무대’를 뜻한다. 자, 이제 장경국의 ‘에이프런 스테이지(apron stage)’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만나 보도록 하자.


OPEN STAGE_장경국 개인전 전시광경_갤러리 R. 2023

장경국의 ‘웃는 남자’

장경국의 <웃는 남자>(2020)는 무표정한 남자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그런데 장경국은 무표정한 남자의 입가에 마치 기괴하게 상처를 낸 것처럼 표현해 놓았다. 따라서 그의 <웃는 남자>는 웃지 않아도 웃고 있는 표정으로 보인다.

장경국_웃는 남자_Oil on canvas_27x35cm. 2020

문득 빅토르 위고(Victor Hugo)의 소설 『웃는 남자(L'homme qui rit)』(1869)가 떠오른다. 소설 속의 ‘웃는 남자’는 기괴하면서도 우스꽝스러운 표정만 지을 수 있는 주인공 그윈플랜(Gwynplaine)의 별명이다. 소설의 배경은 17세기 말의 영국이다. 1800년대 영국에서는 기형적인 모습을 지닌 사람들을 구경거리로 보여주는 프릭쇼(freak show)가 열렸단다. 이를테면 ‘괴물쇼(freak show)’에는 엉덩이가 큰 흑인원주민이나 태국출신인 삼쌍둥이 등 다양한 기형 인간을 프릭쇼에 출연되었다고 말이다. 그리고 당시 영국 귀족들 사이에는 기형적인 사람들을 일종의 ‘애완용’으로 사고 파는 것이 유행했단다.

그런데 위고의 소설에 등장하는 ‘웃는 남자’는 선천적인 장애로 태어난 기형 인간들이 아니라 콤프라치코스(Comprachicos)가 인위적으로 만들어 낸 기괴한 인간이다. 콤프라치코스는 스페인어로 ‘어린이 구매자(child buyer)’를 뜻한다고 한다. 소설에서는 당시 영국 귀족들이 콤프라치코스에게 선천적인 기형아보다 더욱 괴기스러운 기형적인 인간을 요구한다. 콤프라치코스는 귀족의 요구에 응하기 위해 아이들을 납치해서 기형으로 만들기 위해 온갖 악행을 저지른다. 소설 속의 주인공 그윈플렌은 갓난아기 때 콤프라치코스에 유괴당해 ‘웃는 남자’로 변신한다.

그렇다면 장경국의 <웃는 남자>가 웃지 않아도 웃고 있는 표정으로 보인다는 점에서 위고의 ‘웃는 남자’를 재현한 것이란 말인가?. 머시라? 장경국의 <웃는 남자>는 현대인의 내면을 표현한 것 같다고요? 우리는 타자 앞에서 웃고 싶지 않지만 웃는 모습을 보인다. 말하자면 우리는 내면의 ‘상처’를 타인에게 은폐한다고 말이다. 따라서 우리는 내면의 ‘상처’를 숨기기 위해서 오히려 과장된 표정을 짓기도 한다.

그런데 장경국의 <웃는 남자>는 기괴한 표정을 드러낸다. 그렇다면 그의 <웃는 남자>는 내면의 ‘상처’를 외부(얼굴)로 표현한 것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위고의 ‘웃는 남자’가 외상(外傷)을 입은 것이라면, 장경국의 <웃는 남자>는 내상(內傷)을 입은 모습을 외부로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도대체 마음의 상처가 얼마나 컸으면 얼굴을 기괴한 ‘웃는 남자’로 표현해 놓았을까?

우리는 ‘외상’을 흔히 몸의 겉에 생긴 상처를 통틀어 이르는 말로 사용한다. 반면에 ‘내상’은 겉으로 보이는 외상과는 달리 신체 내부에 입는 상처를 뜻한다. 따라서 내상은 일반적으로 외상에 비해 훨씬 위험하고 치료/회복이 힘든 부상으로 간주한다. 왜냐하면 중요한 기관일수록 몸 내부에 있기 때문이다.

외상은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있지만, 내상은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없다. 물론 우리가 ‘광학의 눈’을 빌리면 내상도 외상처럼 볼 수 있다. 만약 장경국의 <웃는 남자>가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없는 내상을 외상으로 표현해 놓은 것이라면, 우리는 어떤 눈으로 그의 <웃는 남자>를 보아야만 할까?

미술평론가 류병학 씨는 “‘사람들은 그윈플렌을 괴물로 보았지만, 데아는 그를 천사로 보았다”면서 그 이유를 “장님 데아가 어둠 속에서 그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그의 영혼을 보았기 때문”인 것으로 들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장경국의 <웃는 남자>를 마음의 눈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장경국의 ‘몽상가’

장경국은 1997년부터 간헐적으로 일명 ’몽상가‘ 시리즈를 작업한다. 왜 그는 ‘몽상가’ 시리즈를 1990년대 말경부터 현재까지 지속하고 있는 것일까? 만약 여러분이 장경국의 전작들을 모조리 조회해 본다면, 그의 모든 인물화가 ‘몽상가’라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모든 회화가 일종의 ‘몽상화(夢想畵)’라는 것을 감 잡을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몽상’은 그의 작품세계로 접근하는데 중요한 키워드인 셈이다. 그렇다면 ‘장경국의 몽상’은 무엇일까?

장경국_몽상가 I_Oil on canvas_27x35cm. 2021

장경국의 <몽상가 I>(2021)은 남자의 상처투성이의 얼굴을 그린 그림이다. 그리고 그의 <몽상가 II>(2022)는 울창하게 자란 나무들로 둘러싸인 사람을 그린 그림이라면, 그의 <몽상가 III>(2022)는 하늘로 솟은 머리카락과 함께 잎이 자란 남자의 얼굴을 그린 그림이다. 흥미롭게도 그의 그림들은 누구나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는 그림으로 보인다.

머시라? 장경국의 <몽상가 I> 얼굴에 표현된 상처들이 마치 그의 <웃는 남자> 상처처럼 내면의 ‘상처’(들)로 보인다고요? 나는 당신의 ‘몽상’에 박수를 보낸다. ‘몽상(夢想)’이 문자 그대로 ‘꿈속의 생각’을 뜻한다면, 꿈은 잠을 자고 있는 수면 중에 기억이나 정보를 무작위로 자동 재생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꿈은 밤에 무의식적으로 꾸는 것인 반면, 몽상은 낮에 의식적으로 꾸는 꿈인 셈이다.

바슐라르(Gaston Bachelard)는 몽상에 ‘코키토(cogito)’가 있다고 말한다. 이를테면 ‘나는 몽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고 말이다. 따라서 몽상은 수동적인 꿈과 달리 능동적이다. 몽상은 현실세계가 아닌 가상세계 안에서 현실을 자각하고 의식적으로 활동한다는 점에서 바슐라르는 ‘비현실의 기능’이라고 명명한다.

그런데 그동안 현실의 잣대로 ‘비현실의 기능’을 평가했기 때문에 몽상은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했다고 바슐라르는 지적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장경국의 ‘몽상가’ 시리즈를 현실적 잣대로 읽지 말아야 한단 말인가? 미술평론가 류병학 씨는 “만약 우리가 비현실적 잣대로 그의 ‘몽상가’ 시리즈를 몽상한다면, 우리는 그의 비현실적 이미지를 꿰뚫어 보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촛불’을 보고 ‘타오르는 꽃’으로 부른다.

장경국은 이번 갤러리 R의 개인전에 인물화 외에도 정물화도 전시한다. 그런데 그의 ‘정물화’ 시리즈 중 정물화인지 풍경화인지 모호한 ‘정물-풍경’ 한 점이 있다. 그의 <정물 - 타오르는 꽃>(2021)이 그것이다. 그것은 세 송이 꽃이 마치 불타오른 것처럼 표현된 그림이다.

장경국_정물 - 타오르는 꽃_Oil on canvas_22x26.5cm. 2021

미술평론가 류병학 씨는 장경국의 <정물 - 타오르는 꽃>을 ‘불꽃’으로 부른다. 물론 류 씨가 말하는 ‘불꽃’은 “타고 있는 불(빛)과 꽃을 접목시킨 것”이다. 문득 바슐라르는 『초의 불꽃(La Flamme d’une chandelle)』이 떠오른다. 바슐라르는 램프와 전등 사이의 차이를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결코 전등은 기름으로 빛을 만들던 그 살아 있는 램프의 몽상들을 우리에게 주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빛이 관리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우리의 유일한 역할은 스위치를 돌리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다만 기계적인 동작의 기계적 주체일 뿐이다. 긍지를 품고서, 우리 자신을 ‘불을 켜다’라는 동사의 주어로 구성하는 그 행위의 덕을 더는 볼 수 없다.”

그런데 촛불은 화가와 닮았다. 왜냐하면 화가는 마치 촛불처럼 자신의 에너지를 발산하여 혼자 타오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화가와 촛불은 스스로를 태워 ‘어둠’을 밝힌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화가는 자신을 소멸시키면서 ‘어둠’을 밝히는 촛불처럼 자신을 태우면서 ‘어둠’을 밝힌다고 말이다. 그렇다면 화가와 촛불은 단지 어둠 속에 빛을 내는 물질로 국한되기보다 우리를 내면으로 안내하는 신비로운 물질로 확장되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화가가 그린 이미지는 ‘시각적인 이미지’를 넘은 ‘물질적 이미지’가 아닌가?

바슐라르는 ‘시각적 이미지’를 ‘형태적 이미지’로 보는 반면, ‘물질적 이미지’는 ‘정신적 이미지’에 속한다고 말한다. 따라서 ‘물질적 이미지’는 이미지의 대상을 형태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가지고 있는 물질성에 기반한 상상력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장경국의 ‘불꽃’은 일종의 ‘상상력의 꽃’이 아닌가?

그런데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물질은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에너지’는 잠재된 변화의 가능성이다. 따라서 같은 물질이라고 하더라도 상황에 따라 각기 다른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그는 ‘촛불’을 보고 ‘타오르는 꽃’으로 부른다. 그는 우리에게 촛불의 시각적 이미지에서 벗어나도록 한다. 나는 그의 ‘불꽃’을 보고 열정으로 중얼거렸다. 물론 혹자는 ‘촛불 집회’를 상상할지도 모른다. 머시라? 당신은 자신을 불태워 주변을 밝히면서 사라지는 촛불을 보면서 삶과 죽음을 몽상한다고요?

꽃을 든 남자

장경국의 ‘꽃을 든 남자’ 시리즈는 남자와 꽃을 접목시킨 그림이다. 그의 <꽃을 든 남자 I>(2022)는 2019년 작업한 <활을 내려놓고>와 문맥을 이룬다고 할 수 있겠다. 물론 2019년판 ‘꽃을 든 남자’는 하나의 화살이 들어있는 화살통을 매고 있지만, 2022년판 ‘꽃을 든 남자’에는 화살통이 사라졌다.

장경국은 <꽃을 든 남자 I>을 꽃과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근육질의 남자로 표현해 놓았다. 남자의 팔뚝은 마치 무쇠처럼 보인다. 꽃을 쥐고 있는 손은 마치 격투기 선수의 손처럼 거칠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꽃은 연약해 보이지 않는다. 흥미롭게도 꽃은 우람한 팔뚝처럼 싱싱해 보인다. 따라서 그의 <꽃을 든 남자 I>은 꿈틀거리듯 ‘살아있는 그림’처럼 느껴진다.


장경국_꽃을 든 남자 I_Oil on canvas_120x150cm. 2022

경국의 <꽃을 든 남자 II>(2022)는 2014년 작업한 그의 <몽상가>를 연상케 한다. 이를테면 그의 <꽃을 든 남자 II>는 마치 부조처럼 표현한 <몽상가>처럼 작업한 것이라고 말이다. 물론 그의 <몽상가>는 인물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반면, 그의 <꽃을 든 남자 II>는 마치 애니메이션의 캐릭터처럼 그려져 있다. 그리고 나뭇잎도 ‘일러스트레이션(Illustration)’ 방식으로 표현되어져 있다.

따라서 장경국의 <꽃을 든 남자 II>는 독특한 회화로 보인다. 물론 그의 <꽃을 든 남자 II>는 <몽상가>와 마찬가지로 언 듯 보면 대담한 붓질로 그려진 듯 보인다. 그러나 당신이 그의 그림으로 한 걸음 더 들어가 보면 정교할 정도로 세심하게 표현한 것임을 볼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명암의 극적인 대비를 통해 양감과 질감을 생생하게 그려놓았기 때문이다.


장경국_꽃을 든 남자 II_.Oil on canvas_130x162cm. 2022

이런 단편적인 정보들은 장경국의 <꽃을 든 남자 II>가 세심하게 연출된 것임을 알려준다. 말하자면 그것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표현된 것이라고 말이다. 나는 지나가면서 장경국이 <몽상가>를 통해 ‘새로운 르네상스를 꿈꾸는 화가’로 중얼거렸다. 물론 그가 꿈꾸는 새로운 르네상스는 회화는 2차원 평면에 물감으로 그려진 ‘물질적 이미지’이다. 그가 <몽상가>에서 자본주의라는 ‘야만시대’를 극복할 수 있는 ‘초인’을 꿈꾸었다면, 그는 <꽃을 든 남자 II>에서 니체의 ‘어린아이’를 등장시킨다.

어린아이는 고사리 같은 손으로 진흙을 쥐고 조물락거린다. 그러다 어린아이는 우연하게 흙으로 빚어진 형상을 보고 신기해 한다. 그래서 어린아이는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진흙으로 이런저런 형상들을 빚는다. 바슐라르는 어린시절 의식하지 못하고 체험한 순간들을 통해 ‘물질적 상상력’이 비롯된다고 말한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물질’이란 4가지 기본 요소인 물과 불 그리고 흙과 공기를 지칭하는 ‘에너지’를 뜻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장경국의 <꽃을 든 남자 II>를 ‘시각적 이미지’를 넘어 ‘물질적 상상력’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나는 ‘소년’을 추앙(推仰)한다.

장경국의 <비가 내리면>(2022)은 비로 인해 고개를 숙인 풀을 바로 세우는 소년을 그린 그림이다. 그런데 당신이 이 그림을 현실적인 잣대로 본다면, 당신은 이 그림을 전혀 논리적이지 않다고 판단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비가 내리고 있는 상황에서 비로 인해 고개를 숙인 풀을 바로 세운다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기 때문이다. 와이? 왜 장경국은 부질없는 행동을 하는 소년을 그려놓은 것일까?


장경국_비가 내리면_Oil on canvas_40.5x53cm. 2022

문득 꽃을 감싸 안은 것으로 표현한 <살아난 꽃>(2019)이 떠오른다. 소년은 시들어 죽을 것 같은 꽃을 지극정성으로 보살펴 살린다. 소년은 살아난 꽃이 다시 시들지 않도록 고사리 같은 두 손으로 꽃의 주위를 감싸 안고 있다. 난 소년의 따뜻한 마음씨에 감동 먹었다. 그렇다! 난 소년의 아름다운 마음씨에 경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소년을 추앙(推仰)한다.

소년은 들판에서 놀다가 비를 만났다. 들판의 풀은 쏟아지는 비로 인해 ‘허리’를 숙인다. 소년은 풀의 허리가 아플 것 같았다. 소년의 눈에는 자칫하면 풀이 허리를 크게 다칠 것 같아 보였다. 그래서 소년은 쏟아지는 비로 인해 구부러진 허리를 펴게 한다. 하지만 쏟아지는 비로 인해 풀은 다시 허리를 구부린다. 소년은 다시 풀의 구부러진 허리를 편다. 난 소년의 순진한 행위를 보면서 가슴이 뭉클했다. 그래, 나는 소년을 추앙한다.

‘고독(solitaire)’ 혹은 ‘연대(solidaire)’

장경국은 이번 갤러리 R 개인전에 ‘화가의 방’ 시리즈를 선보인다. 그의 <화가의 방 I>(2022)는 ‘작업실’ 안에서 끈으로 묶인 양반다리하고 있는 화가를 그린 그림이라면, 그의 <화가의 방 II>(2022)는 끈으로 포획된 붓을 잡고 있는 화가를 그린 그림이고, 그의 <화가의 방 III>(2022)는 끈으로 묶인 붓을 들고 의자에 앉아 있는 화가를 그린 그림이며, 그의 <화가의 방 IV>(2022)는 오른손에는 붓을 그리고 왼손에는 책을 들고 있는 화가를 그린 그림이다.

장경국의 <화가의 방 IV>는 화가가 나무들로 둘러싸여 있는 그림이다. 그런데 화가의 방과 전등 그리고 나무들은 마치 시들은 나무처럼 무채색으로 그려져 있는 반면, 화가는 컬러로 표현되어 있다. 물론 화가의 몸 가까이에 있는 두 개의 나뭇잎은 푸르다. 따라서 살아있는 화가의 몸 가까이에 있는 잎은 살아있는 반면, 그 이외의 사물들은 한결같이 시들어가고 있다.

머시라? 왜 화가는 살아있는 반면, 나무들은 시들어가고 있느냐고요? 화가는 눈을 감고 몽상에 빠져있는 듯 보인다. 뭬야? 그렇다면 화가가 몽상하는 동안 나무들이 시들어 버린 것이라고요? 화가는 나무들이 시들어갈 정도로 오랜 시간 몽상에 잠긴 것 같다. 네? 도대체 화가가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몽상하고 있길래 나무들이 시들어가느냐고요?

나는 지나가면서 화가가 오른손에 붓을 그리고 왼손에 책을 들고 있다고 중얼거렸다. 그것은 화가가 그림을 그릴 것인지 아니면 글쓰기를 할 것인지 고민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화가 앞에 놓인 흰 종이에 낱말이 하나 쓰여져 있는 것이 아닌가. 그 낱말은 단편소설 <요나, 작업 중인 예술가(Jonas, ou l'artiste au travail)> 맨 마지막 문장을 연상시킨다. 나는 그 낱말을 Solitaire(고독)이라고 읽어야 할지 Solidaire(연대)라고 읽어야 할지 모르겠다.

프랑스어로 ‘솔리떼르(solitaire)’는 ‘고독’을 뜻하고, ‘솔리데르(solidaire)’는 ‘연대’를 의미한다. ‘고독’과 ‘연대’는 낱말 중간의 ‘t’냐 ‘d’냐로 달라진다는 점이다. 그런데 장경국은 낱말 중간의 알파벳을 불명료하게 써 놓았다. 이를테면 그것이 'd'인지 't'인지 분명하지 않다고 말이다. 장경국은 <화가의 방 IV> 부제를 ‘고독(solitaire) 혹은 연대(solidaire)’로 표기해 놓았다. 그렇다면 그 낱말은 ‘고독’과 ‘연대’를 아우르는 이중적인 의미를 지닌 것이란 말인가?


장경국_화가의 방 IV_고독(solitaire) 혹은 연대(solidaire)_Oil on canvas-97x130cm. 2022

장경국은 화가의 왼손에 들려 있는 책 표지에 ‘새’를 그려놓았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새’는 자유롭게 하늘을 날아다니는 ‘자유’를 상징한다. 화가는 스스로 작업실에 고립되어 있으면서 동시에 자유를 꿈꾸고 있는 것이 셈이다. 그런데 그 ‘새’는 다름아닌 ‘파랑새’가 아닌가? 그렇다면 화가가 찾던 ‘꿈’은 바로 ‘화가의 방’ 안에 있는 것이 아닌가?

아웃사이더

2023년 장경국은 일명 ‘아웃사이더(outsider)’ 시리즈를 작업한다. 그의 ‘아웃사이더’ 시리즈는 상처투성이 얼굴이나 기괴한 표정을 짓고 있는 얼굴을 그린 일종의 ‘초상화’들이다. ‘아웃사이더’는 흔히 사회의 기성 틀에서 벗어나서 독자적인 사상을 지니고 행동하는 사람을 뜻한다. 영어 ‘아웃사이더’는 인사이더(insider)의 반대어로, 원래 국외자(局外者)니 전문적 지식이나 소양이 없는 문외한(門外漢) 혹은 품위가 없는 사람이나, 경마에서의 인기 없는 말을 가리키는 단어라고 한다.


장경국_아웃사이더_Oil on canvas_45.5x53cm. 2023

그렇다면 장경국의 ‘아웃사이더’는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그의 ‘아웃사이더’는 한쪽 눈은 뜨지 못할 정도로 구타를 당한 모습이나 곁눈질하는 모습 그리고 고집스러워 보이는 오그라진 입 모양 등을 하고 있는 인물들이다. 장경국은 ‘아웃사이더’의 배경에 별다른 묘사를 하지 않았다. 이를테면 그는 공간의 사실성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오직 인물의 사실성과 감정에만 집중했다고 말이다. 따라서 희망이나 긍지를 상실한 그의 ‘아웃사이더’는 마치 ‘삶이 곧 전쟁’이라는 듯 처참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인물의 감정을 드러낸다.

우리는 육체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육체를 종종 잊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주로 의식과 감정으로 생활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에게 육체적 고통이 찾아오면 우리는 육체를 새삼 깨닫는다. 따라서 장경국의 ‘아웃사이더’는 육체 감각을 부활시킨 셈이다. 물론 ‘아뭇사이더’의 일그러진 얼굴은 내면의 ‘비극’을 표면으로 표현한 것이다.

와이? 왜 ‘아웃사이더’는 인생을 비극으로 보는 것일까? 왜냐하면 ‘아웃사이더’는 ‘살기 위해 밥을 먹는다’는 모순의 세계에 절망적으로 갇혀있다는 것을 깨닫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웃사이더’는 인생을 비극으로 보아야 살 수 있는 셈이다. 그래서 ‘아웃사이더’는 ‘먹고 살기 위한 확고한 토대를 마련하기’ 위해 자기만의 방에 틀어박힌다. 그렇다면 장경국의 ‘화가의 방’은 다름아닌 혼자만의 세계에 고립하여 과잉된 자의식에 빠진 화가의 모습을 표현한 것이란 말인가?

‘아웃사이더’는 일상생활이라는 속박에서 눈을 뜬다. 인생의 공허함을 느끼는 ‘아웃사이더’는 자기 자신을 깊이 알고자 자신을 불신한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을 극복하고자 하는 자는 자신에게 불만을 느끼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아웃사이더’는 자신의 연약함과 분열된 마음을 극복하고자 한다. 따라서 ‘아웃사이더’는 자신을 극복하기 위해서 확고한 토대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그런데 ‘아웃사이더’가 일상생활의 속박에서 벗어나면 ‘공허’라는 고통을 만난다. ‘아웃사이더’는 자신이 병들어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아웃사이더’는 자신이 병자라는 불쾌한 사실을 직시한다. 이를테면 ‘아웃사이더’는 현실이라는 꿈 속에서 깨어나 공허를 본다고 말이다. 그런데 그것을 안다는 것은 자신이 ‘절벽’에 다다른 것을 의미한다. ‘아웃사이더’는 자신의 강인한 힘을 자각하지만 어떻게 발휘할지 모른다. ‘아웃사이더’는 행동하는 대신 사고한다.

장경국은 행동하는 대신 그림을 그린다. 따라서 그는 자기를 초월하려는 의욕을 잃지 않은 아티스트이다. 그러면 그는 그가 사는 세계에 대해 눈을 뜬 ‘아웃사이더’가 아닌가? 그는 우선 자신을 깊이 통찰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통찰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가 염세주의에 빠지는 것은 당연하기조차 한 것이 아닌가?

미술평론가 류병학 씨는 ”경국의 초기 작품세계가 현대인의 부조리를 나타냈다면, 중기의 작품세계는 생의 공허를 깨달은 한 화가의 정신세계를 그려냈다“고 말한다. 따라서 류 씨는 ”이 시기에 제작된 작품들의 저변에는 삶의 허무가 깔려있다:고 덧붙인다. 이를테면 자의식 강한 한 화가가 화폭에 절망적인 저항의 몸짓을 표현해 놓았다고 말이다. 하지만 그는 삶의 허무를 한탄스러워하거나 분노하지 않고 담담하게 그려놓았다.

장경국의 ‘인물화’는 인물의 심리묘사를 독특하게 표현한다. 따라서 그의 ‘인물화’는 일종의 ‘심리회화’라고 할 수 있겠다. 그는 인물의 심리묘사를 위해 특히 인물의 손과 발 그리고 눈빛에 주목한다. 와이? 왜 그는 인물의 손과 발 그리고 눈빛에 주목하는 것일까? 혹 인물의 손과 발 그리고 눈빛이 그에게 인물의 정체성을 표현하는데 적절한 부분이 아닐까? 그는 그 부분들이 “인물의 지난 과거를 함축하는 것”이라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저의 인물화는 리얼리티를 추구하기 때문에 인간이 가진 표면의 질감이나 인체 해부학적 측면을 무시한 적은 없어요. 인체 일부를 생략, 과장하거나, 비틀기도 하지만 그것은 그 그림의 의미를 적극적으로 나타내기 위해 의도한 것이죠.”

그런데 장경국의 작품들을 보면 표현 기법이 다양하다. 말하자면 그는 각각의 작품이 지향하는 내용에 부합하는 표현 기법을 채택한다고 말이다. 그 점에 관한 장경국의 목소리를 직접 들어보자.

“저는 표현에 있어 특정한 방식을 고수하기보다 당위성을 먼저 찾아요. 대상과 이미지에 맞는 방식을 대입하다 보니 같은 기법이 없죠.”

몽상가 장경국은 세계 안에 사는 우리 인생의 다양한 모습들을 ‘몽상’한다. 관객은 그의 회화에서 우리 삶에 대해 되돌아보게 될 것이다. 문득 바슐라르의 반향(resonnances)과 울림(retentissement)이 떠오른다. 그는 반향과 울림의 차이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반향은 세계 안에 사는 우리 인생의 다양한 측면들로 흩어지는 반면, 울림은 우리 자신의 존재의 심화에 이르도록 우리를 부른다. 반향 속에서 우리는 시(詩)를 듣는다. 울림 속에서 우리는 시를 말한다. 이때 시는 우리의 것이다.”

바슐라르는 우리에게 시적인 지향성(intentionalite poetique)을 통해 시인의 이미지를 우리의 것으로, 시인의 작품을 우리의 작품으로 삼는 역동적인 태도를 요구한다. 그러면 장경국은 관객에게 무엇을 요구할까? 그의 육성을 직접 들어보자.

“저의 ‘인물화’가 인간 실존과 자아에 대한 반성의 결과물이라면, 저의 ‘풍경화’와 ‘정물화’는 자연적 대상과의 교감을 통한 생명존중을 메시지로 담고 있습니다. 제 그림을 보고 삶에 대한 반성과 회고 또는 어떤 물음표를 던져줄 수 있다면 그걸로 족합니다.”

새로운 미술 출판문화
스마트폰만 있다면 언제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장경국 ‘전자-도록(digital-catalogue)’

출판사 KAR은 2021년 12월부터 올해 초까지 전자도록을 총 38권(한글판 27권, 영문판 11권) 발행하였습니다. 출판사 KAR의 전자도록은 그동안 미술평론가 류병학 씨가 집필한 21명 작가의 작가론들과 일부 작가들이 직접 집필한 일종의 ‘전자_아트북(Digital_Art Book)’입니다.

출판사 KAR은 미술계에 새로운 출판문화를 선도하고자 합니다. 미술평론가 류병학 씨는 “‘전자-도록’의 도래는 출판문화의 변화를 넘어 질적인 미술계를 조성하는데 기여하게 될 것”으로 내다보았습니다.

출판사 KAR은 이번 갤러리 R에서 열리는 장경국 작가의 전자도록도 발행합니다. 장경국 & 류병학의 『몽상화(夢想畵)』가 그것입니다. 전자도록 『몽상화』에는 장경국 작가의 전작들이 수록되어 있고, 장경국의 작품세계를 해석한 류병학 씨의 평론이 실려있습니다.

출판사 KAR에서 발행한 한글판 전자도록은 국내 온라인 서점들(예스24, 교보문고, 알라딘, 리디북스, 밀리의 서재)에서 그리고 영문판 전자도록은 아마존에서 소장 가능합니다.

 

『몽상화(夢想畵)』
저자 : 장경국 류병학
출판사 : 케이에이알(KAR)
발행일 : 2023년 3월 2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