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rigine de la photo

갤러리 R의 하봉호 3부작 기획전 2부 하봉호 개인전 <사진의 기원(L'Origine de la photo)>

갤러리R(황영배 대표)은 2022년 후반기 하봉호 사진전 3부작을 선보입니다. 하봉호 사진전 3부작은 ‘죽음’과 ‘탄생’ 그리고 ‘삶’을 테마로 제작한 작품들로 이루어진 하봉호 개인전들입니다. 하봉호 사진전 3부작은 다음과 같습니다.

2022.07.02 - 07.23 : 하봉호 사진전 1부
2022.08.06 - 08.27 : 하봉호 사진전 2부
2022.11.26 - 12.17 : 하봉호 사진전 3부

지난 7월 2일부터 7월 23일까지 갤러리 R에서 열린 하봉호 사진전 1부 전시타이틀은 『와다다다!!!(WOW~DADADA!!!)』였고, 부제는 ‘한 걸음 더 너에게로(one step closer to you)’였습니다. 갤러리 R은 8월 6일부터 8월 27일까지 하봉호의 두 번째 개인전 『사진의 기원(L'Origine de la photo)』을 개최합니다.

미술평론가 류병학은 하봉호 사진작가를 “국제미술계에 맞짱 뜰 수 있는 사진작가”로 보았다. 그런데 ‘하봉호’를 미술계에서 아는 사람은 극히 일부일 것 같다. 혹 그가 신인이냐고요? 아니다! 그는 1957년생으로 환갑을 넘어선 작가이다. 그렇다면 그가 국내 미술계에서 활동하지 않았느냐고요? 그는 국내외 미술계에서 ‘가끔’ 활동한다.

하봉호는 1986년 일본 오사카 예술대학 사진학과를 졸업하고, 일본대학교 사진대학원 연구과정 2년을 졸업했다. 그는 1986년부터 1992년까지 일본 포토마스 스튜디오(Photomas studio)와 ㈜포톰(POTHOM)에서 근무했다. 이후 그는 한국으로 귀국하여 1994년 빛과 사진을 만드는 집단 ‘하와모두(hawamodu)’를 설립한다. 현재 그는 ‘하와모두’의 대표이면서 아티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하봉호는 사진과 영상 작품을 주로 작업한다. 일단 그가 참여한 전시회들을 나열하도록 하겠다. 2016년 부산비엔날레, 미디어+아트 패러다임 2016 세계미학자대회 대중예술축전 특별전(아트센터 화이트블럭), 이것은 기술이 아니다(정다방프로젝트), Art in Life(갤러리 양산), 2013년 ART MAP 2013 마을프로젝트(정선), 2012년 평창비엔날레, 2010년 디지페스타(광주비엔날레관), 2009년 아시아 아트 비엔날레(Asia art Biennale, 국립대만미술관), 2009년 프라하비엔날레, 2008년 봄날은 간다(광주시립미술관), 2007년 한국현대미술제(예술의 전당)과 5028(갤러리 이룸 개관 기념 초대전), 2004년 사진의 방향(실크 갤러리), 2002년 한국 미술의 자화상(세종문화회관 미술관), 1994년 한국 현대 사진의 흐름전(예술의 전당), 1988년 사진 새 시좌전(워커힐미술관) 등이다.

하봉호가 굵직한 국제전들에 초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국내 미술계에 잘 알려지지 않은 이유가 무엇일까? 사실 그의 전시회 경력은 앞에서 나열한 전시회가 거의 전부라고 할 수 있을 정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술평론가 류병학이 하봉호를 국제 사진계에 맞짱 뜰 수 있는 국내 사진작가로 간주한다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봉호는 카메라의 시스템을 뒤집는 사진 작업을 하는 독특한 사진작가이다. 그는 사진의 메커니즘을 몸으로 습득하여 아트 사진을 ‘찍는다’라기보다 차라리 ‘창조한다’라고 말하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그는 사진을 통해 사진을 벗어나려는 작가라고 할 수 있다.”

하봉호 작가는 이번 갤러리 R 개인전에 올해 제작한 신작들만 선보입니다. 스티로폼(styrofoam)에 나이프와 숟가락으로 파낸 조각작품 1점과 이백여 개에 달하는 벚나무 가지들로 연출한 설치작품 1점 그리고 솜(cotton)에 컬러로 벚꽃들을 인쇄한 작품 1점이 그것입니다. 갤러리 R은 하봉호 개인전 『사진의 기원(L'Origine de la photo)』을 아래와 같이 개최하오니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전시제목 : 사진의 기원(L'Origine de la photo)
초대작가 : 하봉호

전시작품 : 스티로폼(styrofoam) 조각작품 1점, 벚나무 가지들
설치작품 1점, 솜(cotton)에 컬러로 인쇄한 작품 1점

전시장소
갤러리R(gallery R)
서울특별시 성동구 광나루로 294 성동세무타워 B01호
TEL 02-6495-0001
e-mail galleryrkr@gmail.com

전시기간 : 2022년 8월 6일 - 8월 27일
Artist Talk 2022년 8월 13일(토) 오후 3시

전시기획 : 갤러리 R 객원큐레이터 류병학

전시오픈 : 매주 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오픈시간 : 오후 1시부터 7시까지
전시휴관 : 매주 일요일, 월요일


‘벚꽃’이 피었습니다

형태가 만들어져
색을 입고
움직임이 생겨도
그저 한 줌의 가시광선일 뿐
피가 튀고 뿜어져 나와 뒤엉켜야 비로소 의미가 된다.
얼마나 더 붉어져야
나는 내가 될까.
차원이 11개면 뭐하나
이곳에서 태어나
이곳에서 살다
이곳에서 죽을 텐데...
아쉬운 것도 없고
그래서 두려움도 없다.

- 2022년 7월 22일 곤지암 작업실에서 하봉호


하봉호_사진의 기원(L'Origine de la photo)_갤러리 R. 2022

하봉호의 ‘세상의 기원(L'Origine du monde)’

만약 관객이 갤러리 R로 들어선다면 마치 백색의 대리석처럼 보이는 한 점의 백색-조각을 만나게 될 것이다. 백색-조각은 높이 180센티와 폭 90센티의 직사각형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거대한 백색-조각의 중심에 구멍이 하나 있다. 만약 관객이 백색-조각으로 한 걸음 더 다가간다면, 그 구멍은 어떤 도구를 사용하여 손으로 파낸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그 백색-조각은 윤광 피부를 자랑하는 대리석이 아니라 스티로폼이 아닌가? 도대체 하봉호는 무슨 도구로 스티로폼에 구멍을 낸 것일까? 그의 육성을 직접 들어보자.

“스티로폼을 파내는 데 사용한 도구는 숟가락과 포크였습니다. 저는 동서양의 음식문화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도구를 고려해 보았던 것이죠. 저는 숟가락과 포크를 번갈아 가면서 스티로폼에 구멍을 냈는데, 생각보다 스티로폼의 내구성이 강해 도구를 사용하여 파는데도 쉽지 않더군요. 1시간 정도 숟가락과 포크로 구멍을 파내다 보니 손에 물집이 생겼습니다.”


L'Origine du monde_styrofoam_180x90x60cm(d). 2022

머시라? 백색 스티로폼에 구멍 난 것이 마치 모든 것을 빨아들인다는 ‘블랙홀Black hole)’처럼 느껴진다고요? 뭬야? 당신의 눈에는 ‘백색’ 스티로폼에 구멍이 난 것이란 점에서 모든 것을 내놓는다는 ‘화이트홀(white hole)’로 보인다고요? 하봉호는 숟가락과 포크로 직사각형의 백색 스티로폼에 구멍을 낸 작품을 <세상의 기원(L'Origine du monde)>이라고 작명했다.


L'Origine du monde_styrofoam_180×90×60cm(d). 2022

세상의 기원? 오르세미술관(Musee d'Orsay)에 소장되어 있는 귀스타브 쿠르베(Gustave Courbet)의 <세상의 기원(L'Origine du monde)>(1866)이 떠오른다. 쿠르베의 <세상의 근원>은 당시 터키 대사였던 칼릴 베이(Khalil Bey)의 주문에 따라 제작된 것이라고 한다. 칼릴 베이는 앵그르(Jean Auguste Dominique Ingres)의 <터키탕(The Turkish Bath)>(1862)을 소장했던 컬렉터이기도 하다.

하지만 카릴 베이는 경제적 곤경에 처하자 자신이 소장하던 그림들을 내놓았다고 한다. 쿠르베의 <세상의 기원> 역시 어느 소장가의 손에 넘어갔다. 소문에 의하면 정신분석학자 라캉(Jacque Lacan)이 1955년 이름을 밝히지 않은 채 150만 프랑을 주고 쿠르베의 <세상의 기원>을 구입했단다. 라캉이 사망한 뒤 쿠르베의 <세상의 기원>은 이 그림은 국가에 환수돼 오르세 미술관에 소장하게 되었단다.

쿠르베의 <세상의 기원>은 ‘여성의 성기를 적나라하게 묘사한 누드화’이다. 이를테면 그것은 모델의 부분(유방과 음부 그리고 허벅지 등)만 화폭에 담았다고 말이다. 따라서 마치 포르노처럼 여성의 성기에 카메라가 초점을 맞추듯 그려진 쿠르베의 <세상의 기원>은 그 적나라함 때문에 관객에게 충격을 준다. 그러나 그 충격은 오랜 시간을 필요치 않고 적잖은 남자에게 관음증을 불러일으킨다. 와이? 왜냐하면 쿠르베의 <세상의 기원>에 관음증을 박탈할 ‘모델의 시선’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자, 원점으로 돌아가 보자. 원점? 하봉호의 <세상의 기원> 말이다. 우선 그것은 여성의 성기를 은유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특정 인간(여성)을 모델로 조각된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객은 하봉호의 <세상의 기원>이 쿠르베의 <세상의 기원>과 문맥을 이루는 것으로 간주할 수 있겠다. 그 점에 관해 류병학 미술평론가는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하봉호의 <세상의 기원>은 쿠르베의 <세상의 기원>을 ‘오마주(hommage)’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쿠르베의 <세상은 기원>은 특정 인간(여성)을 모델로 그려진 그림이란 점에서 ‘인간의 기원’이라면, 하봉호의 <세상의 기원>은 불특정한 것을 조각한 것이란 점에서 ‘세상의 기원’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겠다.”

하봉호의 ‘코라(chora)’

관객이 하봉호의 <세상의 기원>을 관통하면 거대한 전시공간을 마치 핏줄들처럼 연출한 설치작품을 만나게 될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핏줄들’은 이백여 개에 달하는 나뭇가지에 붉은 페인트로 칠한 것이다. 와이? 왜 하봉호는 나뭇가지들에 붉은 페인트를 칠한 것일까? 그의 목소리를 직접 들어보자.

“저는 갤러리 R 출입공간에 <세상의 기원>을 설치하고, 메인 전시공간에 거대한 ‘자궁’을 만들고자 기획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일단 철사들로 핏줄들을 만들어 보았죠. 물론 저는 철사들에 붉은 페인트칠도 했지요. 하지만 제가 아무리 기교를 부려도 자연스러운 핏줄은 만들어지지 않더군요. 어느 날 탄천을 산책하다가 우연히 벚나무를 가지치기한 것들을 보게 되었습니다. 저는 탄천 공원 관계자로부터 허락을 받아 가지치기한 벚나무 가지들을 모아서 작업실로 옮겨와 붉은 페인트칠을 해보았죠. 제가 원하던 바로 시뻘건 핏줄이었어요.”

하봉호는 시뻘건 핏줄들을 전시장 벽면뿐만 아니라 천장으로까지 확장해 설치하였다. 따라서 관객은 작품 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작품 안에 들어있는 셈이다. 시뻘건 핏줄들에 둘러쌓인 관객은 압도당한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시간이 지날수록 붉은 방은 아늑함까지 느끼게 한다. 하봉호는 이 설치작품을 <코라(chora)>라고 작명했다.


CHORA_print on the cherry branches_installation. 2022

코라? 플라톤(Plato)은 『티마이오스(Timaeus)』에서 ‘코라’를 만물 생성의 근원으로 기술했다. 이를테면 만물은 ‘코라’를 통하지 않고는 생겨나지 않는다고 말이다. 플라톤은 ‘코라’를 ‘혼돈’과 ‘질서’ 사이에 위치하는 ‘트리톤 게노스(triton genos)’로 보았다. 말하자면 ‘코라’는 언제나 존재하지만 사물을 생겨나게 하지 않는 ‘존재’와 언제나 사물을 생겨나게 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생성’ 사이에 위치한다고 말이다. 따라서 ‘존재’와 ‘생성’ 혹은 ‘질서’와 ‘혼돈’을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세 번째인 ‘코라’가 필요한 셈이다. 플라톤은 흥미롭게도 ‘코라’를 다음과 같이 ‘어머니의 자궁’에 비유한다.

“...인식 가능하며 영원한 온갖 종류의 모방된 것들을 융통성 있게 수용할 수 있도록 적합하게 되어진 실체는, 그 자체로, 형태가 없다. 그러므로 그녀를 흙, 공기, 물, 불, 집합체 그리고 구성성분의 이름으로 시각과 모든 감각에 의해 인지 가능한 생성된 세계의 어머니 그리고 수용체라고 말하지 말자. 만약 우리가 그녀를 눈으로 볼 수 없고, 형태도 없고, 복잡한 방식이지만 지성적인 것이 참여하고 있는 것이라고 묘사한다면, 우리는 그녀를 진정으로 묘사하는 것이다.(...it is right that the substance which is to be fitted to receive frequently over its whole extent the copies of all things intelligible and eternal should itself, of its own nature, be void of all the forms. Wherefore, let us not speak of her that is the Mother and Receptacle of this generated world, which is perceptible by sight and all the senses, by the name of earth or air or fire or water, or any aggregates or constituents thereof: rather, if we describe her as a Kind invisible and unshaped, all-receptive, and in some most perplexing and most baffling way partaking of the intelligible, we shall describe her truly.)”

쿠르베의 <세상의 기원>이 ‘어머니의 자궁’을 상징한 것이라면, 하봉호의 <세상의 기원>은 ‘우주의 자궁’을 은유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문득 ‘우주(cosmos)’라는 작품을 만들었다는 ‘데미우르고스(DEMIOURGOS)’가 떠오른다. 플라톤은 『티마이오스』에서 데미우르고스를 우주의 창조주로 승격시켰다. 데미우르고스는 원래 ‘제작자’를 뜻한단다. 따라서 플라톤은 ‘제작자’를 대문자로 써서 ‘조물주’로 승격시킨 셈이다.

플라톤은 언제나 존재하지만 사물을 생겨나게 하지 않는 ‘존재’와 언제나 사물을 생겨나게 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생성’을 알기 위해서 ‘트리톤 게노스’를 필요로 한다. 그것이 바로 조물주이다. 플라톤은 데미우르고스를 조물주로 승격시켜 ‘우주’라는 작품을 만들게 한다. 플라톤에게 우주는 영혼을 지닌 살아 움직이는 세계로 고귀한 정신에 의해 질서 있게 움직인다.

데미우르고스는 언제나 같은 상태로 있는 것을 우주의 모델(paradeigma)로 삼았다. 여기서 ‘모델’은 ‘패러다임(paradigm)’의 어원으로 ‘이데아(idea)’를 뜻한다. ‘이데아’는 ‘보다’ ‘알다’라는 뜻의 그리스어 ‘이데인(idein)’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이데아’는 원래 ‘보이는 것’, 즉 형태나 모양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데아’와 ‘보다(eido)’에서 비롯된 ‘에이도스(eidos)’ 역시 ‘형태’라는 의미를 지닌다. 그런 까닭일까? 고대 그리스 철학은 ‘이데아’와 ‘에이도스’를 구분해서 사용했다. ‘에이도스’가 구체적인 현상과 감각되는 사물의 형상(形象)을 가리킨다면, ‘이데아’는 육안이 아니라 마음의 눈으로 통찰되는 사물의 순수하고 완전한 형태를 가리킨다. 따라서 ‘이데아’는 우리가 감각하는 현실적 사물의 원형으로 모든 존재와 인식의 근거가 되는 초월적인 실재를 뜻한다. 그러므로 현실 세계의 모든 것들은 ‘이데아’를 본떴거나, 이데아를 모델로 삼아 이루어진 것들인 셈이다.

만약 데미우르고스가 ‘우주’를 창조했다면, 하봉호는 ‘우주의 자궁’을 만든다. 따라서 ‘코라’를 모델로 삼은 하봉호의 <코라>는 영원하고 불변하는 사물의 본질적인 원형(原形)인 ‘이데아’를 위협한다. 왜냐하면 이데아의 모사에 지나지 않는 그의 <코라>는 불변하며 항구적인 속성을 지닌 이데아를 흔들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데아/에이도스뿐만 아니라 존재/생성 그리고 질서/혼돈이라는 이분법을 해체시킨다. 그렇다면 그에게 미술은 ‘세계-내-존재’가 아닌 오히려 세계 밖에 있는 것을 사유하게 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코라’를 시각적 이미지로 구현하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것이 아닌가? 왜냐하면 ‘코라’는 예지계뿐만 아니라 현상계에도 속하지 않다는 점에서 언어뿐만 아니라 시각적으로도 표현될 수도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봉호가 ‘코라’를 물질적 형상으로 연출한 것은 더 이상 ‘코라’가 아니라는 것을 알려준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언어나 시각적 이미지로도 포착할 수 없는 바로 그것이 언어와 시각적 이미지를 그려내는 ‘바탕(코라)’이라는 점이다.

관객은 이백여 개가 넘는 나뭇가지로 벽면뿐만 아니라 천장까지 가득 채운 공간 안에 서 있다. 따라서 관객은 거대한 ‘자궁’ 안에 들어있는 셈이다. ‘코라’에서 되풀이되어 나타나는 자기 동일성은 ‘들어오고 나가는 것들’이다. 여기서 ‘들어오고 나가는 것들’이란 단순히 들어오고 나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어떤 이미지가 스크린에 생겼다 사라지는 변화를 뜻한다. 그런데 변화하는 ‘코라’는 ‘언제나 존재하는 것(idea)’을 위태롭게 한다. 그 점에 관해 류병학 미술평론가는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하봉호의 <코라>는 관객을 ‘작품(코라)’ 안에서 밖으로 나가게 하면서 동시에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게 합니다. 따라서 관객은 ‘코라’ 안으로 들어가고 ‘코라’ 밖으로 나가면서 어떤 변화를 겪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저는 하봉호의 <코라>를 통해 신비함과 위대함 그리고 성스러움 같은 감정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CHORA_print on the cherry branches_installation. 2022

하봉호의 ‘몽(MONG)’, 사진의 기원?
평평한 인화지가 아닌 비정형의 솜에 사진을 인화
에디션(edition)이 없는 사진
사진을 통해 사진을 벗어난 사진

관객이 하봉호의 <코라>를 관통하면 화사한 사진 한 점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것은 활짝 핀 벚꽃(Cherry Blossom)들을 인화한 사진이다. 머시라? 하봉호의 <코라>에서 보았던 붉은 페인트칠을 한 벚나무 가지들과 벚꽃 사이에 어떤 관계가 형성되는 것 같다고요? 하봉호의 육성을 직접 들어보자.

“저의 <코라>에 설치된 벚나무 가지들을 보면 몽우리들이 맺어있는 것을 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관객이 아직 피지 아니한 어린 꽃봉오리들이 맺어있는 시뻘건 벚나무 가지들을 따라가다 전시장 마지막 벽면에서 활짝 핀 벚꽃들로 이루어진 사진을 만나는 연출을 고려했지요. 그래서 저는 올해 4월 초 남해에서 시작해 서울로 올라오면서 벚꽃들을 촬영했습니다. 저는 당시 촬영한 벚꽃들을 300여 개의 솜뭉치에 프린트를 했는데, 그것이 저의 <몽(MONG)>(2022)입니다.”


MONG_print on cotton_120×180cm. 2022

벚나무는 잎보다 꽃을 먼저 피운다. ‘벚꽃’은 흔히 ‘봄’을 상징한다. ‘봄’의 어원에 대해서는 분분하다. ‘봄’의 다양한 어원 중에 '~보다'의 명사형인 '봄'에서 왔다는 설이 있다. 이를테면 ‘봄’은 모든 것을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본다’고 말이다. 그렇다면 하봉호는 벚꽃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본 것일까?

뭬야? ‘몽’이 무슨 뜻이냐고요? 혹 그것은 ‘꿈(夢)’을 의미하는 것 아니냐고요? 네? 당신의 눈에는 그것이 ‘몽실몽실’을 뜻하는 것 같다고요? 만약 당신이 눈부시게 아름다운 500여 송이의 벚꽃들로 한 걸음 들어가 본다면, 그것이 평평한 인화지가 아닌 비정형의 솜에 프린트된 것임을 보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하봉호의 <몽>은 사진작품이라고 단정할 수 없지 않을까? 왜냐하면 그것은 전통적인 사진의 개념을 해체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사진은 복제 가능하다. 말하자면 사진에는 에디션이 있다고 말이다. 그런데 하봉호의 <몽>은 비정형의 솜에 프린트된 것이란 점에서 복제 불가능하다. 이를테면 그의 ‘솜-사진’에는 에디션이 없다고 말이다. 따라서 그의 작품은 한 마디로 ‘사진을 통해 사진을 벗어나고자 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다.

머시라? 하봉호의 <몽>이 어떤 점에서 ‘사진의 기원’이냐고요? 뭬야? 사진의 기원은 1837년 루이 쟈크 망데 다게르(Louis Jacques Mande Daguerre)가 완성한 은판 사진술인 일명 ‘다게레오타입(Daguerreotype)’을 뜻하는 것 아니냐고요? 네? 사진의 기원은 다게르가 ‘다게레오타입’을 완성하는 데 영감을 받은 ‘카메라 옵스큐라(Camera Obscura)’로 거슬러 올라가야 할 것 같다고요? 그 점에 관해 류병학 미술평론가는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물론 우리가 흔히 사진기의 역사를 언급할 때 등장하는 것이 바로 '카메라 옵스큐라'이다. 그런데 내가 하봉호의 <몽>을 ‘사진의 기원’으로 보는 것은 전통적인 사진 역사의 관점에서가 아니다. 그의 <몽>은 그 누구도 시작하지 않았던/못했던 비정형의 솜에 사진을 프린트했다. 따라서 그의 <몽> 이후 사진의 ‘입구’는 확장되게 되었다. 말하자면 그의 <몽>은 전통적인 의미의 평평한 인화지에 인화된 사진에서 확장되어 어떤 사물들에도 프린트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놓았다고 말이다. 그런 점에서 그의 <몽>은 사진의 기원이 되는 셈이다. 만약 당신이 그의 <몽>을 넘어서고자 한다면, 당신은 하봉호가 만들어 놓은 좁은 ‘출구’로 나가야만 할 것이다.”

***

하봉호의 사진전 3부작은 ‘죽음’과 ‘탄생’ 그리고 ‘삶’을 주제로 제작한 작품들로 이루어진다. 하봉호 사진전 1부 『와다다다!!!(WOW~DADADA!!!)』는 ‘죽음’을 다루었다면, 이번 하봉호 사진전 2부 『사진의 기원(L'Origine de la photo)』은 ‘탄생’을 다루고 있다. 만약 우리가 죽음을 알 수 없는 미래라고 말한다면, 탄생 역시 (우리가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알 수 없는 과거라고 말할 수 있겠다. ‘말할 수 없는 것’ 혹은 ‘표현할 수 없는 것’에 대해 표현하는 것이 바로 하봉호의 작품세계라고 할 수 있겠다.

새로운 미술 출판문화
스마트폰만 있다면 언제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하봉호 ‘전자-도록(digital-catalogue)’

출판사 KAR은 작년 12월부터 올해 초까지 한글판 전자도록을 총 23권 발행하였다. 출판사 KAR의 16권 전자도록들은 그동안 미술평론가 류병학 씨가 집필한 17명 작가(김을, 김태헌, 김해민, 도수진, 류제비, 박기원, 박정기, 손부남, 손현수, 안시형, 이기본, 이유미, 이현무, 장지아, 하봉호, 허구영, 홍명섭)의 작가론들과 일부 작가들이 직접 집필한 일종의 ‘전자_아트북(Digital_Art Book)’이다.

출판사 KAR은 미술계에 새로운 출판문화를 선도하고자 한다. 미술평론가 류병학 씨는 “‘전자-도록’의 도래는 출판문화의 변화를 넘어 질적인 미술계를 조성하는데 기여하게 될 것”으로 내다보았다.

출판사 KAR은 이번 갤러리 R의 하봉호 개인전 『와다다다!!!』를 위해 하봉호 작가의 전작들과 함께 미술평론가 류병학 씨의 ‘하봉호론’을 수록한 전자도록 『나는 사진을 통해 사진을 벗어나고 싶다』를 발행했다. 출판사 KAR에서 발행한 전자도록은 온라인 서점들(예스24, 교보문고, 알라딘, 밀리의 서재)에서 구매 가능하다. 그리고 출판사 KAR은 류병학 씨의 ‘하봉호론’을 수록한 영문판 전자도록 『Escape from the Photography through the Photography』를 발행하여 아마존에서 판매 중에 있다.

Escape from the Photography through the Photography
저자 : 하봉호 류병학
출판사 : 케이에이알(KAR)
발행일 : 2022년 7월 1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