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o’s afraid of Red, Yellow and Blue?

갤러리 R 기획전 최상흠 개인전
『누가 빨강, 노랑 그리고 파랑을 두려워하랴?』

갤러리 R(gallery R)은 지난 2월 개관전 를 시작으로, 류제비 개인전 『꽃과 바람과 별 그리고 소년(FLOWER, WIND, STAR and BOY)』, 박정기 개인전 『사기열전(詐欺列傳)』, 강진이 개인전 『나의 인형 이야기』, 하봉호 개인전 『와다다다!!!(WOW~DADADA!!!)』와 『사진의 기원(L'Origine de la photo)』을 개최하였습니다.

갤러리 R(황영배 대표)은 9월 17일부터 10월 8일까지 최상흠 작가의 개인전 『누가 빨강, 노랑 그리고 파랑을 두려워하랴?(Who's afraid of Red, Yellow and Blue?)』를 개최합니다.

최상흠 작가는 계명대학교 미술대학에서 회화과를 졸업했습니다. 그는 봉산문화회관과 구지 갤러리(Goozi Gallery), 이포 갤러리(yfo gallery), 굿 스페이스(good space), 을 갤러리(EUL gallery), 갤러리 분도(Gallery Bundo) 그리고 스페이스 자모(space jamo) 등에서 개인전을 개최한 바 있습니다. 그는 다수의 그룹전에도 초대되었습니다. 대표적인 그룹전은 다음과 같습니다.

1988년 『대구독립작가 리그』(태백화랑), 1991년 『프린트 메시지』(백화랑), 『인카운터 1991년』(계명대 갤러리), 1994년 『4인전』(시공갤러리, 인공갤러리), 1996년 『트레커』(신라갤러리), 2015년 『1587전』(스페이스 B, 봉산문화회관), 『강정-대구현대미술제』(강정보), 2016년 『Neti Neti』(갤러리 소소), 2017년 『대구예술 생태보감』(대구예술발전소), 2018년 『회사후소(繪事後素)』(세컨드 에비뉴 갤러리), 2019년 『그 이후(Since then)』(시안미술관)이 그것입니다.

최상흠 작가는 2016년 이포 갤러리에서 열린 개인전에서 일명 ‘인더스트리 페인팅(Industry painting)’ 시리즈로 미술계로부터 주목을 받습니다. 그의 ‘인더스트리 페인팅’은 산업용 투명 레진 몰탈(resin mortar)에 아크릴물감으로 조색한 다음 경화제를 혼합한 일종의 ‘인더스트리 물감’으로 작업된 것입니다. 따라서 그의 ‘인더스트리 페인팅’은 전통적인 회화의 ‘손맛’이나 회화의 ‘정면성’을 넘어선 독특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최상흠 작가는 이번 갤러리 R 개인전에 올해 제작한 신작들만 선보입니다. 최상흠 작가가 직접 제조한 ‘인더스트리 물감’으로 제작한 신작 ‘무제(UNTITLED)’ 시리즈 12점이 그것입니다. 갤러리 R은 최상흠 개인전 『누가 빨강, 노랑 그리고 파랑을 두려워하랴?(Who's afraid of Red, Yellow and Blue?)』를 아래와 같이 개최하오니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전시제목 : 누가 빨강, 노랑 그리고 파랑을 두려워하랴?(Who's afraid of Red, Yellow and Blue?)

초대작가 : 최상흠
전시작품 : ‘인더스트리_물감’으로 제작한 작품 12점

전시장소
갤러리R(gallery R)
서울특별시 성동구 광나루로 294 성동세무타워 B01호
TEL 02-6495-0001
e-mail galleryrkr@gmail.com
homepage galleryr.kr

전시기간 : 2022년 9월 17일 - 10월 8일
전시기획 : 갤러리 R 객원큐레이터 류병학

Artist Talk : 2022년 9월 24일(토) 오후 3시

전시오픈 : 매주 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오픈시간 : 오후 1시부터 7시까지
전시휴관 : 매주 일요일, 월요일


불가촉(不可觸) 회화
최상흠

나는 2014년부터 ’불가촉 회화‘(손자국이 적나라하게 보여서 붙인 이름이다)를 시작한다.

나는 소규모 건축과 인테리어 디자인과 감리 일을 하면서 여러 건축재료를 시공한 경험이 있다. 그중 하나가 레진 몰탈이다, 레진 몰탈은 붓이나 롤러로 작업하는 것이 아니라 헤라로 적당하게 펼쳐 놓으면 스스로 균질하게 면을 채워 나간다. 두꺼운 도막을 형성하며 투명한 유광의 물성을 가진 재료로 조색해서 사용하고 있다.

작업하는 과정은 단순하고 반복적이다. 캔버스를 작업대 위에 뉘어서 적당량의 재료를 붇고 헤라로 펴준다(그 다음 과정은 재료가 평활하게 제자리를 잡는지를 지켜보는 것이다). 이 과정을 20-30회 반복하여 완성한다. 색은 그때그때 즉흥적으로 선택하거나 의도적으로 선택한다.

그리지 않고 그리기

나는 깡통에 들어있는 질료를 한정된 장소에 옮겨 놓는 메신저이다.

색(色)은 물질적 요소를 총칭하며 공간을 점유하는 연장태, 작업은 물질의 집적(集積), 연기(緣起)에 의해 잠시 현현(顯現)함.

수묵으로 달을 그릴 때 달은 희므로 채색하지 않고 나머지 부분을 그린다. 이것을 드러내기 위해 저것을 그린다(烘雲托月法).

경물은 객관적 물상에 지나지 않는데, 여기에 어떻게 자신의 마음을 얹을 수 있는가, 화가는 말을 할 수 없으므로 경물이 직접 말하게 해야 한다(寫意傳神).


Who's afraid of Red, Yellow and Blue?

누가 빨강, 노랑 그리고 파랑을 두려워하랴? 그것은 2022년 9월 갤러리 R에서 오픈하는 최상흠 작가의 개인전 타이틀이다. 그는 갤러리 R 전시장에 신작 ‘무제(UNTITLED)’ 시리즈 12점을 전시해 놓았다. 12점 중에 빨강과 노랑 그리고 파랑의 3점을 옆으로 나란히 비치한 작품 <무제 XII>(2022)가 있다.

그런데 최상흠의 <무제 XII>는 엄밀하게 말하자면 빨강과 노랑 그리고 파랑 등 원색(Primary colour)이 아니라 다홍색(cherry red)과 연두색(Yellow Green) 그리고 옥색(light blue)에 가까운 일종의 ‘간색(間色)’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를테면 그의 컬러들은 화려하고 부드러우며 맑고 밝은 화사한 일종의 ‘파스텔 컬러(pastel color)’라고 말이다.

최상흠의 <무제 XII>는 3점으로 이루어져 있다. 따라서 그 3점(Three Pieces)은 각각 독립적인 작품이면서 동시에 한 점의 작품이기도 하다. 따라서 그 3점은 조셉 코슈스(Joseph Kosuth)의 목소리를 빌려 말하자면 ‘하나 그리고 세 점의 회화(One and Three Paintings)’라고 할 수 있겠다.


최상흠_UNTITLED XII_resin, acrylic, 47×81.5cm×3ea. 2022

최상흠의 ‘하나 그리고 세 점의 회화’는 2015년부터 오늘날까지 꾸준히 업그레이드하고 있는 일명 ‘인더스트리 페인팅(Industry_painting)’이다. 왜냐하면 그의 그림은 미술용 물감으로 그려진 것이 아니라 공업용 도료(塗料)로 제작된 작품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인더스트리_물감’은 산업용 투명 레진 몰탈(resin mortar)에 아크릴물감으로 조색한 다음 경화제를 혼합한 것을 뜻한다.

그런데 최상흠이 투명 레진 몰탈에 아크릴물감으로 조색할 때 매번 미소(微小)한 차이를 갖도록 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는 물감을 붓에 묻혀 캔버스에 그리는 것이 아니라 물감을 캔버스에 부어서 제작한다. 그렇다! 그는 우선 캔버스를 이젤이나 벽면에 기대어 작업하지 않고 바닥에 펼쳐놓고 작업한다. 그는 바닥에 뉘어놓은 캔버스 표면에 물감을 부은다. 그러면 물감은 스스로 서서히 캔버스 가장자리로 퍼질 것이다.

최상흠은 물감이 스스로 캔버스의 ‘경계’를 넘어서 굳을 때까지 기다린다. 그는 물감이 굳고 나면 그 위에 다시 경화제를 혼합한 레진 몰탈에 또 다른 아크릴물감을 넣어 조색하여 만든 ‘인더스트리 물감’을 붓는다. 그는 캔버스에 물감 붓기를 수십 번 반복한단다. 물론 그는 물감 붓기와 마르기 사이에 기다림도 반복할 것이다. 두말할 것도 없이 그는 자신의 반복된 행위를 어느 순간 멈춘다.

최상흠의 작업과정은 ‘블랙 페인팅’을 작업한 스텔라(Frank Stella)의 진술을 떠오르게 한다. “나는 물감통에서 캔버스로 페인트를 꺼내고 싶었다.(I wanted to get the paint out of the can and onto the canvas.)” 물론 스텔라는 물감통에서 물감을 캔버스로 옮길 때 붓을 사용했다. 그 점에 관해서 칼 앙드레(Carl Andre)는 <줄무늬 회화에 대한 서언(Preface to Stripe Painting)>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앙드레는 스텔라의 ‘줄무늬 회화’를 “캔버스 위의 붓의 통로들(the paths of brush on canvas)”이라면서 “그 통로들은 오직 회화 속으로만 향할 뿐(these paths lead only into painting)“이라고 말한다. 그렇다! 스텔라가 ’블랙 페인팅‘을 그릴 때 물감통에서 붓에 물감을 묻혀 캔버스에 줄무늬를 그려놓았던 반면, 최상흠은 물감통에서 물감을 캔버스 위에 부어놓았다.

최상흠의 ‘인더스트리 페인팅’은 일종의 ‘컬러-필드 페인팅(Color-Field Painting)’이다. 그런데 그것은 그린버그(Clement Greenberg)가 명명한 ‘회화적 이후의 추상(Post-Painterly Abstraction)’을 한 걸음 더 밀고 들어간 작품이다. 이를테면 그의 ‘인더스트리 페인팅’은 모리스 루이스(Morris Louis)의 ‘줄무늬’나, 케네스 놀란드(Kenneth Noland)의 ‘원형’들, 엘스워스 켈리(Ellsworth Kelly)의 ‘색면 덩어리’, 쥴스 올리키(Jules Olitski)의 ‘가장자리 띠’마저도 없는 문자 그대로의 ‘컬러-필드 페인팅’이라고 말이다.

머시라? 갤러리 R의 최상흠 개인전 타이틀인 ‘누가 빨강, 노랑 그리고 파랑을 두려워하랴?’가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다고요? 뭬야? 문득 바넷 뉴먼(Barnett Newman)의 <누가 빨강, 노랑 그리고 파랑을 두려워하랴(Who's afraid of Red, Yellow and Blue)> 시리즈가 떠오른다고요? 네? 혹 최상흠의 ‘누가 빨강, 노랑 그리고 파랑을 두려워하랴?’는 뉴먼의 제목을 그대로 차용한 것 아니냐고요?

뉴먼의 작품은 몬드리안(Piet Mondrian)의 <빨강 노랑 파랑의 구성(Composition with Red, Yellow and Blue)>(1928)에 대한 패러디로 해석되기도 한다. 뉴먼은 ‘그림이란 비례와 균형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몬드리안의 말에 대해 ‘그의 기하학이 형이상학을 삼켜 먹었다’고 비판했다. 이를테면 ‘이성’이 ‘감성(열정)’을 집어삼켰다고 말이다.

뉴먼의 <누가 빨강, 노랑 그리고 파랑을 두려워하랴 I>은 직사각형(190.5x121.92cm)의 캔버스를 수직으로 세운 그림이고, <누가 빨강, 노랑 그리고 파랑을 두려워하랴 II>는 정사각형(304.8x304.8cm) 캔버스에 작업된 그림이며, <누가 빨강, 노랑 그리고 파랑을 두려워하랴 III>는 거대한 직사각형(243.84x543.56cm) 캔버스에 작업한 그림이고, <누가 빨강, 노랑 그리고 파랑을 두려워하랴 IV>는 거대한 캔버스(274.32x604.52cm)에 그려진 그림이다.

뉴먼의 대표작으로 알려진 <누가 빨강, 노랑 그리고 파랑을 두려워하랴 III>(1966-1967)는 거대한 캔버스에 붉은색으로 마치 ‘도배’한 듯 보인다. 따라서 뉴먼의 <누가 빨강, 노랑 그리고 파랑을 두려워하랴 III>는 몬드리안이 추구한 ‘미(beauty)’가 아닌 ‘숭고(sublime)’를 지향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만약 당신이 뉴먼의 거대한 그림을 한눈에 포착하고자 한다면, 당신은 그림으로부터 뒷걸음질을 해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뉴먼은 관객이 자신의 그림으로부터 뒷걸음 할 수 없도록 한다. 왜냐하면 그는 관객이 자신의 그림을 한눈에 포착하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는 자신의 그림이 관객을 압도하도록 만들고자 한다고 말이다. 만약 관객이 뉴먼의 거대한 그림을 일정한 거리를 두고 본다면, 관객은 거대한 그림을 한눈에 포착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작품을 ‘축소판 사진’으로 보고 있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그는 관객이 자신의 그림을 일정한 거리를 두고 볼 수 없도록 연출해 놓았다.

그런데 뉴먼은 강렬한 붉은 그림 가장자리에 흥미롭게도 파랑색 띠와 노랑색 띠를 그려놓았다. 말하자면 그는 붉은 화면 왼쪽 가장자리에 파랑색 띠를 그려놓은 반면, 화면 오른쪽 가장자리에는 노랑색 띠를 그려놓았다고 말이다. 뉴먼은 마스킹 테이프를 사용하여 색면과 색면을 마치 ‘날카로운 가장자리(Hard edge)'처럼 구획해 놓았다. 물론 노랑색 띠는 파랑색 띠와 달리 가늘어 세심하게 보아야만 한다. 하지만 노랑색 띠와 파랑색 띠는 흥미롭게도 관객의 시선을 압도하는 붉은 화면을 한계짓는다. 따라서 최상흠의 눈에는 뉴먼의 그림에도 여전히 몬드리안의 비례와 균형을 잔존하게 한 것으로 보인다.

류병학 미술평론가는 ”최상흠의 ’인더스트리 페인팅‘ 크기는 뉴먼의 그림보다 턱없이 작지만 한 눈으로 포착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의 그림은 두께를 지니기 때문이다. 그의 인더스트리 페인팅은 캔버스를 바닥에 뉘어놓고 그가 만든 인더스트리 물감을 부어 제작한 작품이다. 이를테면 그의 그림은 정면(캔버스 표면)에 부어진 물감이 스스로 흘러 측면으로 넘어간 회화라고 말이다. 따라서 류병학 미술평론가는 ”그의 ’인더스트리 페인팅‘은 뉴먼의 ’정면 회화‘를 넘어 ’측면 회화‘로 확장된 회화“라고 본다. 그의 회화는 정면뿐만 아니라 측면까지 보아야만 온전하게 작품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한눈에 포착되지 않는다.

뉴먼은 관객이 자신의 그림에서 초월적 경험의 실재를 느끼기를 바란다. 그래서 그는 관객이 한 눈으로 포착할 수 없는 거대한 캔버스를 필요로 했다. 말하자면 그는 관객이 그의 그림 앞에서 압도당하는 경험을 원했다고 말이다. 그렇다면 그는 그림 자체가 관객에게 실재이기를 원했던 것이 아닐까? 그런데 최상흠의 작품이야말로 ’실재 그 자체‘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그의 그림은 ’물감 덩어리‘로 이루어진 회화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류병학 미술평론가는 ”’물감 덩어리‘로 제작된 최상흠의 그림은 ‘미션임파셔블’한 숭고를 지향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숭고’는 말할 수 없는 것, 볼 수 없는 것, 표현할 수 없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에게서 미술은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하는 것인 셈이다. 그는 우리에게 낯익은 ‘물감 덩어리’로 현실과 환상 사이의 ‘미궁(labyrinth)’으로 빠트린다. 왜냐하면 그의 오묘한 컬러 그림은 관객의 눈을 멀게 하기 때문이다.

류병학 미술평론가는 ”최상흠은 나의 귀에 ‘누가 미궁을 두려워하랴?’고 속삭인다“면서, 하지만 ”그의 작품은 나에게 여전히 ‘수수께끼(mystery)’로 남아 있다“고 덧붙인다. 문득 버지니아 울프(Virginia Woolf)가 그녀의 저서 『나만의 방(A Room of One’s Own)』(1929)에서 쓴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글이 떠오른다. “때로는 허구가 사실보다 더 진실을 담고 있는 것 같습니다.(Fiction here is likely to contain more truth than fact.)”

최상흠의 ’불가촉(不可觸) 회화‘, 그리지 않고 그리기

최상흠의 ’인더스트리 페인팅‘ 이전 작품들은 흥미롭게도 낯익은 것을 낯설게 전이시키는 일명 ’낯설게 하기(defamiliarization)‘와 닮았다. ’낯설게 하기‘는 우리가 일상적인 것으로 넘겨버리기 쉬운 낯익은 것에 대하여 환기를 시키게 한다. 말하자면 낯익은 것을 낯설게 재구축하면 호기심과 궁금증을 갖게 한다고 말이다. 따라서 관객은 그의 작품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최상흠은 ’인더스트리 페인팅‘을 ’불가촉(不可觸) 회화‘로 부른다. 우리가 지나가면서 보았듯이 그는 오랜 기간 건축 인테리어 일을 하면서 다양한 건축재료로 시공해 보았다. 그는 다양한 건축재료 중 하나인 레진 몰탈로 ’불가촉 회화‘를 시작한다. 그의 ’불가촉 회화‘ 작업방식는 캔버스를 작업대 위에 뉘어놓고 나서 레진 몰탈을 붇는다. 그런데 레진 몰탈은 미술 재료인 붓으로 작업하는 것이 아니라 인테리어 재료인 헤라(scraper)로 펼쳐 놓으면 스스로 균질하게 면을 채워 나간다. 그는 그 행위를 20회에서 30회 정도 반복해 작품을 완성한다.

따라서 우리는 최상흠의 ’불가촉 회회‘에서 전통적인 회화에서 볼 수 있는 일명 ’손맛‘을 볼 수 없다. 왜냐하면 그의 회화는 ’손으로 접촉하지 않고(untouchable)‘ 작업한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피부가 영롱한 그의 ’불가촉 회화‘는 관객이 손으로 접촉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림에 지문이 남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의 ’불가촉 회화‘는 손댈 수 없는 혹은 범접할 수 없는 작품인 셈이다.

최상흠의 ’인더스트리 페인팅‘은 ’불가촉‘뿐만 아니라 ’시각의 사각지대‘로 확장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전통적인 회화의 정면을 넘어서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그것은 그림의 정면을 넘어 측면까지 확장한다고 말이다. 관객이 그의 ’인더스트리 페인팅‘을 온전하게 보고자 한다면, 관객은 그림의 정면에서 측면으로 자리를 옮겨서 보아야 한다. 따라서 그것은 회화도 조각도 아니면서 동시에 회화이면서 조각인 일종의 ’특수한 오브제(Specific Object)‘라고 할 수 있겠다.

‘특수한 오브제’를 탄생시킨 도널드 저드(Donald Judd)는 회화를 '거부'했다기보다 '단념'했는데, 그 이유는 "평평한 표면 위에서는 그것만이 가능한 일만 할 수 있을 뿐"이라고 이해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미니멀리스트가 '되었다'. 흥미로운 점은 '평평한 표면 위에서' 할 수 있는 가능성의 극한까지 몰고 간 스텔라의 ’띠무늬 그림(Stripe Painting)‘을 그린버그는 '좋은 작품이 되기에는 충분치 않다'고 판단했다는 점이다.

와이? 왜냐하면 스텔라의 띠무늬 그림에 '질(quality)'이 적어도 그린버그 눈에 충분치 않은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린버그에게서 '질'은 곧 '알맹이(content)'를 뜻한다. 그러면 그린버그가 말하는 회화의 조건이란 적어도 두 가지, 즉 평면성 뿐만 아니라 알맹이도 해당되는 것이 아닌가? 말하자면 앙드레가 '회화의 길'로 부른 스텔라의 띠무늬 그림은 회화의 조건 중의 하나인 평면성을 성취했지만, 다른 조건인 질의 불충분으로 그린버그에게 ’충분치 않은‘ 작품으로 간주된 것이라고 말이다.

최상흠의 ’인더스트리 페인팅‘은 저드와 스텔라가 멈춘 지점에서 시작한다. 말하자면 그것은 '평평한 표면 위에서' 할 수 있는 또 다른 가능성을 보여준다고 말이다. 최상흠의 ’인더스트리 페인팅‘은 그린버그가 말한 회화의 조건들, 즉 회화의 평면성과 질을 성취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따라서 그린버그는 그의 ’인더스트리 페인팅‘을 ’좋은 작품이 되기에 충분한 것‘으로 보게 될 것이다.

올해 여름 류병학 미술평론가는 최상흠 작가와 함께 미국 시애틀을 방문했다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시애틀 국제공항에 도착한 우리가 처음 만난 것은 만년설이 있는 거대한 산이었다.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감탄사를 연발했다.” 그것은 워싱톤 주의 레이니어 국립공원에 있는 레이니어 산(Mt. Rainier)이다. 레이니어 산은 해발 4392m로 미국에서 두 번째로 높은 산이라고 한다. 류병학 미술평론가는 “레이니어 산 정상은 연중 녹지 않은 만년설로 뒤덮혀 있어 마치 한 폭의 산수화처럼 느껴진다”면서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우리는 시애틀 국제공항에서 렌트 카를 빌려 시애틀 부근에 위치한 숙소로 향했다. 그런데 레이니어 산은 얼마나 거대한지 달리는 도로에서도 보였다. 그렇다! 레이니어 산은 시애틀 곳곳에서 보이는 웅장한 산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시애틀에 일 관계로 방문한 탓에 레이니어 산을 직접 방문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멀리서나마 레이니어 산을 보면서 남다른 감동을 받았던 것 같다. 왜냐하면 그가 한국으로 돌아와 작업한 신작이 바로 레이니어 산을 보고 느낀 감명을 표현한 작품 <무제 VII(UNTITLED VII)>(2022)를 제작했기 때문이다.”


최상흠_UNTITLED VII_resin, acrylic on box, 51×51×53cm×18ea. 2022

최상흠은 30대 초에서 40대 초까지 10년가량 암벽등반(Rock climbing)을 했다고 한다. 암벽등반은 ‘익스트림 스포츠(Extreme Sports)’로 불린다는 점에서 위험한 스포츠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더욱이 당시 그가 행한 암벽등반은 어떤 장비도 없이 맨손으로 암벽을 타는 ‘자유등반(free climbing)’이었다. 그는 10년간 국내의 산들을 찾아다니면서 위험천만한 암벽등반에 빠졌다.

최상흠은 암벽등반을 하면서 산의 장엄함에 매번 감탄하게 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그는 맨손으로 암벽을 타지 않을 수 없었다. TV에서 방영하는 암벽등반 다큐를 보면 등반하는 사람의 몸은 주로 말라보였고 팔에는 근육만 남아있었다. 최상흠의 말에 의하면 암벽 등반하기 위해서는 몸이 최대한 가벼워야 한단다. 그리고 그는 암벽등반에서 중요한 것으로 ‘몸의 균형(balance)’을 들었다.

최상흠은 맨손으로 암벽을 타고 올라갈수록 한계에 도달할 때가 있단다. 말하자면 그가 올라갈 수도 그렇다고 내려갈 수도 없는 상황에 놓여질 때가 있다고 말이다. 그런데 그는 진퇴양난(進退兩難)의 상황이 암벽등반의 매력이라고 말한다. 물론 그는 어쩔 도리가 없는 힘든 상황에서 정상에 올라간다. 그는 극한의 상황을 넘어선다면 형언(形言)할 수 없는 쾌감을 느끼게 된다고 한다.

레이니어 산을 보고 느낀 감명을 표현했다는 최상흠의 신작 <무제 VII>을 보자. 그것은 18개의 정사각형 박스(Box)에 인더스트리 물감을 부어 제작한 작품이다. 박스의 상단은 ‘스틸 블루(steel blue)’에 가깝다면, 박스의 하단은 각종 컬러로 흘러내려 굳어있다. 따라서 최상흠의 ‘스틸 블루’는 다양한 컬러로 만들어진 컬러인 셈이다.

와이? 왜 최상흠은 만년설로 뒤덮힌 레이니어 산의 봉우리를 ‘스틸 불루’로 표현한 반면, 레이니어 산의 하단을 다양한 컬러로 표현한 것일까? ‘스틸 블루’는 흔히 청색 강철과 유사한 파란색으로 간주한다. 말하자면 강철은 녹슬지 않도록 보호하기 위해 청색을 띄게 되는데 그 푸른 색조를 ‘스틸 블루’라고 부른다고 말이다. 그렇다면 최상흠은 연중 눈이 녹지 않는 레이니어 산의 봉우리를 ‘스틸 블루’로 표현한 반면, 그는 산의 하단 부분을 다양한 컬러로 마치 첩첩산중처럼 표현한 것이 아닐까? 그 점에 관해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먼 거리에서도 웅장하게 보이는 레이니어 산은 첩첩산중으로 이루어져 있을 겁니다. 이곳에서는 보이지 않는 산의 하단 부분은 아마 정글처럼 되어 있을 것 같습니다. 만약 우리가 레이니어 산의 시작점에서 화려한 꽃길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눈길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보이는 레이니어 산은 일종의 ‘환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니 50억 년이 만든 자연을 재현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셈이죠.”


최상흠_UNTITLED X_resin, acrylic, 110x56.5cm×3ea. 2022

최상흠은 ’불가촉 회화‘를 “그리지 않고 그리기”라고 말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깡통에 들어있는 질료를 한정된 장소에 옮겨 놓는 메신저이다.” 최상흠의 진술은 스텔라의 다음과 같은 진술을 상기시킨다. “나는 물감통에서 캔버스로 페인트를 꺼내고 싶었다.(I wanted to get the paint out of the can and onto the canvas.)” 하지만 이미 서두에서 중얼거렸듯이 스텔라가 ’블랙 페인팅‘을 그릴 때 물감통에서 붓에 물감을 묻혀 캔버스에 줄무늬를 그려놓았던 반면, 최상흠은 물감통에서 물감을 캔버스 위에 부어놓았다. 따라서 그의 ’불가촉 회화‘는 “그리지 않고 그리기”라고 말할 수 있겠다.

최상흠은 작가노트에 ’그리지 않고 그리기‘ 방식으로 두 가지 사례를 든다. 홍운탁월법(烘雲托月法)과 사의전신(寫意傳神)이 그것이다. ’홍운탁월법‘은 수묵으로 달을 그릴 때 달은 희므로 채색하지 않고 오히려 나머지 부분을 그린다. 말하자면 그것은 구름을 수묵으로 표현하여 아무 것도 그리지 않은 달을 드러나게 한다고 말이다. 따라서 최상흠의 ’인더스트리 페인팅‘은 정작 그리고자 하는 것을 그리지 않고 오히려 다른 것을 그려서 그리고자 하는 것을 드러나게 한 셈이다.

자, 이번에는 ’사의전신‘을 보자. 그것은 흔히 경물을 그리면서 그 사람의 정신세계까지 묘사한다는 것을 뜻한다. 최상흠은 “경물은 객관적 물상에 지나지 않는데, 여기에 어떻게 자신의 마음을 얹을 수 있는가”라고 자문하면서, “화가는 말을 할 수 없으므로 경물이 직접 말하게 해야 한다”고 말한다. 소동파(蘇東坡) 소식(蘇軾)은 왕유(王維)의 그림을 보고 “시중유화(詩中有畵), 화중유시(畵中有詩)”라고 평했단다. 말하자면 ‘시 속에 그림이 있고, 그림 속에 시가 있다’고 말이다. 따라서 ‘사의전신’은 화폭 위에 경물을 통해 작가의 뜻(정신)을 전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송나라 휘종(徽宗) 황제는 그림을 좋아하는 임금이었다고 한다. 그는 유명한 시 가운데 한두 구절을 골라 이를 화제(畵題)로 내놓곤 했단다. 그는 어느날 화가들에게 “어지러운 산, 옛 절을 감추었네(亂山藏古寺)”라는 화제를 주고 그림을 그리도록 하였다. 화가들은 한결같이 퇴락한 절의 모습을 그려놓았다고 한다.

그런데 단 한 화가만 절을 그려놓지 않았다고 한다. 그 화가는 절 대신 어지러운 숲속에 조그만 길과 그 좁은 길로 물을 길어 올라가는 중을 그렸다. 그 그림에는 절은 없지만 중이 물을 길어 좁은 갈로 올라가고 있으니 그 좁은 길 어디엔가 절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지러운 산이 절을 은폐하고 있어 보이지 않을 뿐이다. 따라서 그 화가는 화제에서 ‘감추다(藏)’에 주목한 셈이다. 말하자면 화가는 달을 드러내기 위해 구름을 그린 홍운탁월법과 마찬가지로 절을 드러내기 위해 어지러운 산과 좁은 길과 중을 그려놓은 것이라고 말이다.

류병학 미술평론가는 시애틀 국제공항에서 산봉우리에 만년설이 있는 레이니어 산을 보면서문득 “산은 끊어져도 봉우리는 이어진다(山斷雲連)”는 말을 떠올랐다면서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내가 바라보고 있는 레이니어 산은 구름 위에 솟은 만년설로 뒤덮인 봉우리뿐이다. 하지만 레이니어 산은 구름에 가려진 부분이 더 거대하다. 웅장한 레이너어 산은 단지 구름에 가려져 보이지 않을 뿐이다. 그러면 미술평론가라는 직함을 가진 나는 어떤 글쓰기를 해야만 할까? 혹 나는 최상흠의 작품세계를 눈에 보이는 구름 위에 솟은 만년설로 뒤덮인 산봉우리만 본 것은 아닐까? 그러나 최상흠이 정작 말하고자 하는 것은 구름에 가려진 곳이 아닐까? 문득 “말은 끊어져도 뜻은 이어진다(辭斷意屬)”는 문구가 떠오른다.“

새로운 미술 출판문화
스마트폰만 있다면 언제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최상흠 ‘전자-도록(digital-catalogue)’

출판사 KAR은 작년 12월부터 올해 초까지 한글판 전자도록을 총 23권 발행하였다. 출판사 KAR의 16권 전자도록들은 그동안 미술평론가 류병학 씨가 집필한 17명 작가(김을, 김태헌, 김해민, 도수진, 류제비, 박기원, 박정기, 손부남, 손현수, 안시형, 이기본, 이유미, 이현무, 장지아, 하봉호, 허구영, 홍명섭)의 작가론들과 일부 작가들이 직접 집필한 일종의 ‘전자_아트북(Digital_Art Book)’이다.

출판사 KAR은 미술계에 새로운 출판문화를 선도하고자 합니다. 미술평론가 류병학 씨는 “‘전자-도록’의 도래는 출판문화의 변화를 넘어 질적인 미술계를 조성하는데 기여하게 될 것”으로 내다보았습니다.

출판사 KAR은 이번 갤러리 R의 최상흠 개인전 『누가 빨강, 노랑 그리고 파랑을 두려워하랴?』를 위해 최상흠 작가의 전작들과 함께 미술평론가 류병학 씨의 ‘최상흠론’을 수록한 전자도록 『누가 빨강, 노랑 그리고 파랑을 두려워하랴?』를 발행한다. 출판사 KAR에서 발행한 전자도록은 온라인 서점들(예스24, 교보문고, 알라딘, 밀리의 서재)에서 구매 가능하다.

누가 빨강, 노랑 그리고 파랑을 두려워하랴?
저자 : 최상흠 류병학
출판사 : 케이에이알(KAR)
발행일 : 2022년 9월 2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