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강두천

박기원 VS. 이인현

전시작품 : 회화 13점, 설치작품 1점

전시장소 :
갤러리R(gallery R)
서울특별시 성동구 광나루로 294 성동세무타워 B01호
TEL 02-6495-0001
e-mail galleryrkr@gmail.com

전시기간 : 2023년 5월 13일 - 6월 17일
작가와의 대화 : 2023년 5월 13일(토) 오후 3시

전시오픈 : 매주 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오픈시간 : 오후 1시부터 7시까지
전시휴관 : 매주 일요일, 월요일

작가 박기원(1964년생)은 1989년 충북대학교 사범대학 미술교육과 졸업했다. 1990년 그는 리움미술관의 전신인 호암갤러리의 ‘중앙미술대전’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2005년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참여작가, 2010년 국립현대미술관의 ‘올해의 작가’로 선정되었고, 2022년 김세중조각상을 수상했다.

박기원은 1996년 가인화랑에서 『움직임』이란 타이틀로 처음으로 공간작업을 하고, 1997년 호주 멜버른의 컨템포러리 포토그래피 센터에서 『센스』라는 타이틀로 두 번째 공간작업을 했다. 이후 그는 서울의 아르코미술관과 마드리드의 레이나 소피아 국립미술관 그리고 취리히의 미키윅킴 컨텀포러리 아트와 베이징의 갤러리아 콘티누아 또한 과천의 국립현대미술관과 서울의 313아트프로젝트 등에서 개인전을 개최했다.

박기원의 주요 그룹전은 다음과 같다. 2000년 광주비엔날레 특별전 『한일현대미술의 단면전』, 2004년 마로니에 미술관의 『구름』, 2005년 베니스비엔날레, 2007년 리움 삼성미술관의 『한국미술 : 여백의 발견』, 2008년 몽인아트센터의 『Contextual Listening』, 2009년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의 『신호탄』, 2012년 국립현대미술관의 『한국의 단색화』, 2012년 OCI 미술관의 『순간의 꽃』, 2013년 부산시립미술관의 『한국미술 대항해 시대를 열다』와 아모레퍼시픽미술관의 『Reverscape』 그리고 싱가포르 현대미술파운데이션(Institute of Contemporary Arts Singapore)의 『Daam-hua』.

2014년 독일 베를린 갤러리(East Side Gallery Outdoor Space)의 『Beyond the Border』와 상하이 미술관(SPSI Museum)의 『Empty Fullness』 그리고 2014 프랑스 갤러리(Galleria Continua)의 『Spheres 7』, 2015년 금호미술관의 『옅은 공기속으로』와 DDP의 『Esprit Dior』, 2016년 국립현대미술관의 『달은, 차고, 이지러진다』, 2019년 청주시립미술관 오창관의 『레디컬 아트』와 제주도립미술관의 『생활』, 2020년 국립현대미술관의 『신나는 빛깔마당』, 국립현대미술관의 『수평의 축』.

박기원의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아모레퍼시픽미술관, 루이비통 화운데이션, 청주시립미술관, 대구미술관과 개인 컬랙터들이 소장하고 있다.

작가 이인현(1958년생)은 1980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를 졸업하고, 1983년 그는 일본 문부성 국비 장학생으로 동경예술대학에 입학한다. 1986년 그는 동경예술대학 대학원 미술연구과를 졸업, 1992년 동 대학원 박사과정을 수석으로 졸업한다. 1992년 그는 귀국하여 한성대학교 예술대학 회화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1985년 이인현은 갤러리 PTNA에서 첫 개인전을 개최한다. 이후 그는 토오노화랑과 코바야시화랑, 하시모토화랑, SPACE 11, 류화랑, 카고시마의 파인아트·쿠노키, 후쿠오카의 갤러리 미야비, 서울의 가인화랑, 국제화랑, 노화랑, 인화랑, 더 소소 등에서 개인전을 개최한다.

이인현은 국내외의 다양한 기획전에 초대받았다. 그의 대표적 해외 그룹전은 다음과 같다. 1981년 파리의 Salon de Jeune PEINTRE:EXPRESSION(그랑팔레), 1983년 로스엔젤레스의 한국작가 3인초대전(아트코어갤러리), 1984년 동경의 시화집 「표현의 윤리」(코지스페이스), 1985년 동경의 마루노우치 판화전(마루노우치화랑), 니치도오 판화그랑프리전(니치도오화랑), 1987년 동경의 세이부미술관 판화대상전(세이부미술관), 1988년 시대를 여는 6인전(동경, 후쿠오카, 카고시마), 1992년 PROOF 1992(갤러리이케다미술), 1994년 북해도의 아트셋션 ’94 아사히카와(아사히카와미술관), 1996년 마닐라의 제11회 아주국제미술전람회(마닐라미술관), 동경의 inter-TEXTUALITY(카시와기화랑), 1997년 마카오의 제12회 아주국제미술전람회(투리스카스 센트로), 1998년 쿠알라룸푸르의 제13회 아주국제미술전람회_내셔널아트갤러리, 1999년 시간의 방향(SPACE 11), 2001년 회화의 복권(광동미술관), 2003년 홍콩의 제18회 아주국제미술전람회(Heritage Museum), 2004년 제19회 아주국제미술전람회(후쿠오카미술관), 2005년 프랑크푸르트의 Hallo Gutenberg!(Raphael 12), 2013년 담화(Institute of Contemporary Arts Singapore), 2017년 단색의 리듬 - 한국의 추상(토쿄오페라시티 아트갤러리) 등이 있다.

이인현의 대표적 국내 그룹전은 다음과 같다. 1979년 - 1980년 앙데팡당전(국립현대미술관), 1982년 서울현대미술제(문예진흥원 미술회관), 1994년 - 1995년 서울미술대전(서울시립미술관), 1994년 - 1996년 서울국제판화비엔날레(일민문화관), 1996년 표면과 이면사이(국제화랑), 1997년 DOTS(금호미술관), 1998년 그림보다 액자가 더 좋다(금호미술관), 한국현대판화가협회전(서울시립미술관), 디프로스트(선재미술관), 1999년 山·水·風·景(아트선재미술관), 2000년 광주비엔날레(광주시립미술관), 아닌 혹은 나쁜 징후들!(문예진흥원 미술회관), 2001년 회화의 복권(국립현대미술관), 2002년 그리드를 넘어서(부산시립미술관), 추상화의 이해(성곡미술관), 2004년 한국의 평면회화, 어제와 오늘(서울시립미술관), 2005년 시간을 넘어선 울림(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 Cool & Warm(성곡미술관), 2011년 오늘의 아시아미술(예술의 전당, 전북도립미술관), 2012년 한국의 단색화(국립현대미술관), 2013년 광주아트비젼(광주비엔날레전시관), 색, 감성을 속삭이다(일우스페이스), 2016년 지속가능을 묻는다(서울대학교미술관), 2021년 박기원이 이인현을 만났을 때(CHA 스튜디오) 등이 있다.

이인현은 1980년 공간국제판화대상전 우수상, 1985년 대학판화전 매입상(마루노우치화랑), 1996년 제10회 서울국제판화비엔날레 대상을 수상한 바 있다. 그의 작품은 대영박물관(런던), 국립현대미술관(과천), 서울시립미술관(서울), 부산시립미술관(부산), 아트선재미술관(경주), 아트선재센터(서울), 일민문화관(서울), 공간미술관(서울), 서울대학교(서울) 등에 소장되어 있다.

자강두천 : 박기원 vs 이인현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자강두천’이 무슨 뜻인지 아느냐고? 자강두천? 나는 ‘자강두천’이란 용어를 듣자마자 무협에서 들었던 것 같은 묘한 간지를 느꼈다. 더욱이 ‘자강두천’이라는 어감이 나에게 고사성어(故事成語)로 들렸다. 그래서 나는 누군가에게 ‘자강두천’이 무슨 사자성어(四字成語)냐고 물었다.

누군가 왈, “‘자강두천’은 '자존심 강한 두 천재'를 줄인 신조어입니다.” 따라서 그것은 사자성어가 아닌 순 한글로 이루어진 용어인 셈이다. 그것은 e스포츠가 발전하면서 생겨난 용어라고 한다. ‘자강두천’은, 처음에 ‘승패를 가르기 힘들 만큼 강한 프로게이머들의 싸움’을 의미했다고 한다.

나는 ‘자강두천’의 뜻을 듣자마자 흥분했다. 왜냐하면 나는 갤러리 R에서 기획할 박기원 & 이인현 2인전 타이틀을 놓고 고민하던 중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강두천’은 박기원 & 이인현 2인전에 마치 찰떡궁합처럼 어울리는 타이틀이 아닌가. 나는 ‘자강두천’이란 용어의 찰진 맛에 홀딱 반했다.

머시라? 요즘 ‘자강두천’은 ‘자존심만 강해 서로 이기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애쓰는 모습’을 의미하는 것으로 변질되었다고요? 뭬야? 요즘은 ‘자존심 강한 두 바보의 대결’의 줄임말인 ‘자강두바’도 사용되고 있다고요? 네? 요즘 자강두천은 “둘이서 도토리 키 재기 식으로 다투고 있네‘라는 비아냥으로도 사용된다고요?

버뜨(BUT), 만약 당신이 갤러리 R의 박기원 vs 이인현의 2인전을 직접 보신다면, 당신은 당신의 눈을 호강시켜주는 높은 경지의 대결을 보게 될 것이다. 자, 이제 똥꼬를 조아리고 졸라 ‘자존심 강한 두 천재’인 박기원과 이인현의 불꽃 튀는 명승부를 보도록 하자.

이인현의 <회화의 지층 - 환상의 멀티버스> 시리즈

관객이 갤러리 R로 들어서면 좌/우 벽면에 서로 마주 보도록 설치된 기다란 막대형 캔버스에 그려진 그림 2점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출입구 반대편 벽면 모서리에 옆으로 나란히 설치된 막대형 캔버스에 그려진 그림을 보게 된다.


이인현_회화의 지층 - 환상의 멀티버스(L’épistémè of Painting - Amazing Multiverse). 2023

오잉? 분명 이번 갤러리 R 기획전이 박기원 & 이인현의 2인전이라고 했는데 이인현의 대표작품인 <회화의 지층> 시리즈만 전시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일단 갤러리 R의 전시장 초입 벽면에 서로 마주 보도록 설치된 기다란 막대형 캔버스에 그려진 그림 2점을 보도록 하자.

그것은 같은 크기의 막대형 캔버스(가로 160cm, 세로 10cm)에 작업한 것이다. 전시장 좌/우 벽면에 서로 마주 보고 있는 그림들은 기다란 막대형 캔버스 상단 가장자리에 마치 수성 물감으로 칠해 번지게 한 것처럼 보인다. 만약 당신이 그 그림의 윗면을 본다면, 윗면도 정면과 마찬가지로 마치 수성 물감으로 칠해 번지게 한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 이인현의 <회화의 지층>은 기존 캔버스의 두께와 달리 졸라 두껍다. 그는 막대형 캔버스의 두께를 세로와 마찬가지로 10cm로 제작해 놓았다. 따라서 그의 <회화의 지층>은 정면과 윗면 그리고 아랫면이 모두 같은 크기로 제작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더욱이 그의 <회화의 지층>은 이미지가 정면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윗면과 측면까지 확장된다.

이런 단편적인 정보는 이인현의 <회화의 지층>이 정면에서 온전하게 바라볼 수 없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러므로 관객은 막대형 캔버스의 윗면과 좌/우의 측면에도 번진 이미지를 보기 위해 좌/우측면으로 움직여 작품을 보게 된다. 왜 그는 관객에게 자신의 작품을 정면뿐만 아니라 측면에서도 보도록 작업한 것이냐고요? 이인현의 육성을 직접 들어보자.

“캔버스의 면과 면이 꺾이는 경계는 누가 불가침을 정해놓은 것도 아닐텐데, ‘옆의 아우라’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매우 강력하게 느낄 때가 많습니다. 한 면을 칠할 때는 붓이 절대로 옆으로 넘어가지 않습니다. 그야말로 가상적인 평면에서 붓질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물감이 흘러나와 옆으로 넘어가는 겁니다.”

이인현은 기존 회화의 역사를 ‘정면의 역사’라고 말한다. 그의 <회화의 지층> 시리즈는 바로 ‘정면의 회화’에 딴지를 건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다. 말하자면 그의 <회화의 지층> 시리즈는 그동안 간과되었던 ‘회화의 측면’을 폭로한 작품이라고 말이다. 그는 ‘회화의 측면’이 “없던 걸 내가 새로 만든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있거나 가려졌던 것을 강조하거나 드러낸 것에 불과”하다면서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내 작품의 두께는 10cm 정도로 일반적인 평면작품들보다 상당히 두꺼운데, 이것은 옆면을 강조하려는 의도입니다. 원래 그림이란 정면에서 보는 것이기 때문에 옆면은 사실상 필요 없는 공간입니다. 그런데 회화도 하나의 사물, 오브제인 이상 옆면이 필요가 없다고 해서 삭제해버릴 수는 없는 부분이죠. 요즘 현대회화에서는 액자를 거의 사용하지 않지만, 전통적으로 그림의 옆면은 액자를 위한 공간이었습니다. 액자는 그림의 보호라는 1차적인 용도 이전에 옆면을 가려주는 역할도 하는 거죠. 물감의 덩어리라고 하는 현실의 무게를 벗어나 일루전으로 승격된다고나 할까요.”

오잉? 그런데 캔버스의 윗면과 정면에 그려진 이미지가 똑같은 것이 아닌가? 어떻게 이인현은 작업한 것일까? 만약 당신이 그 그림으로 한 걸음 들어간다면, 캔버스의 정면과 윗면이 만나는 경계선에 칠해진 청색 물감이 위/아래로 번진 청색 물감보다 진하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인현은 막대형 캔버스의 정면과 윗면의 경계선에 붓으로 청색 물감을 칠해 캔버스 위/아래로 똑같이 번지게 한 것이란 말인가?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캔버스의 1mm도 안 되는 직각‘선’에 물감을 칠해 캔버스의 정면과 윗면에 같은 이미지를 번지게 한다는 것은 임파셔블한 미션이다.

머시라? 절대적인 세심함이 작가에게 요구될 것 같다고요? 그런데 세심함으로는 부족할 것 같다. 뭬야? 작가는 정확한 데이터를 얻기 위해 여러 차례 반복하여 작업한 것으로 추론된다고요? 네? 작가는 일명 ‘숙달된 조교’의 행위로 작업한 것 같다고요?

머시라? 전시장 좌/우 벽면에 서로 마주 보고 있는 그림들의 이미지도 같다고요? 그러고 보니 그 두 그림은 같아 보인다. 아무리 ‘숙달된’ 조교의 솜씨로 작업한다고 하더라도 마치 판화처럼 두 그림을 복제하듯 작업할 수 있단 말인가. 더욱이 두 그림의 이미지는 번짐을 통해 드러난 이미지가 아닌가.

뭬야? 그 두 그림 사이에 미소한 차이가 있다고요? 물론 좌측의 그림에 보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번진 선 끝에 점이 하나 있는 반면, 오른쪽 그림에는 그 점이 없다. 그리고 좌측의 그림에서 오른쪽 끝부분에 번진 선과 오른쪽 그림에서 오른쪽 끝부분에 번진 선 사이에 미소한 두께 차이가 있다.

이인현의 <회화의 지층>은 일명 ‘양수리’로 불린다. 양수리? 혹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의 북한강과 남한강이 합류하는 ‘두물머리(兩水里)’를 말하는 것이냐고요? 400년 된 장대한 느티나무와 이른 아침 물안개 피는 양수리의 풍경은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다. 따라서 사람들은 이인현의 <회화의 지층>을 보고 양수리 풍경을 떠올렸던 것 같다. 이인현의 육성을 직접 들어보자,

“강에 먼 산이 비치듯이 그림에 그림을 붙여서 찍어내고 지나가면서 산의 옆면도 보게 되는 거죠. 사람들이 보고 ‘양수리 풍경 같다’고 해서 저도 그냥 ‘양수리’라고 부릅니다.”

그림에 그림을 붙여서 찍어낸다? 이인현의 <회화의 지층>은 그린 것이 아니라 판화와 마찬가지로 찍은 것이다. 그의 작품은 <회화의 지층>이 아니라 <회화의 지층_재생>이다. 그의 <회화의 지층_재생>은 초기작업 방식에서 업그레이드한 버전이라고요?


이인현_회화의 지층 - 환상의 멀티버스 #I(L’épistémè of Painting - Amazing Multiverse #I)_oil on canvas_10(h)x160(w)x10(d)cm. 2023

이인현의 ‘양수리’ 초기작업 방식은 위와 아래의 산들을 절묘하게 대칭되게 작업하기 쉽지 않다. 왜냐하면 캔버스 윗면에 물감을 칠해 앞면으로 번지게 하여 완벽한 대칭을 얻기는 미션 임파셔블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이후 판화방식을 채택한 신작 <회화의 지층 - 환상의 멀티버스 #I(L’épistémè of Painting - Amazing Multiverse #I)>(2023)이다. 작가의 육성을 직접 들어보자.

“우선 바닥에 캔버스 천을 펼치고 붓을 사용하여 물감을 칠해 놓습니다. 그리고 두 개의 캔버스에 동일한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기다란 막대에 천을 두 겹으로 겹쳐 싸서 막대형 캔버스를 만듭니다. 막대형 캔버스의 긴 모서리 부분을 물감이 칠해진 바닥의 캔버스 천에 눌러서 찍습니다. 그리고 기다란 막대에 겹쳐 싼 두 겹의 천을 해체해서 각각의 기다란 막대에 다시 매면, 두 막대형 캔버스에 같은 이미지를 얻을 수 있는 것이죠.”


이인현_회화의 지층 - 환상의 멀티버스 #II(L’épistémè of Painting - Amazing Multiverse #II)_oil on canvas_10(h)x160(w)x10(d)cm. 2023

자, 이번에는 벽면 모서리에 90도 직각으로 설치한 신작 <회화의 지층 - 환상의 멀티버스 #II(L’épistémè of Painting - Amazing Multiverse #II)>(2023)을 보도록 하자. 그것은 <회화의 지층 - 환상의 멀티버스 #I>과 마찬가지로 막대형 캔버스의 상단에 청색 물감을 번지게 표현한 작품이다. 물론 막대형 캔버스의 정면 상단에 번진 이미지는 윗면에도 마치 대칭되듯이 똑같이 번져있다. 덧붙여 막대형 캔버스의 좌/우 측면에도 물감이 조금 번져있다.

그런데 이인현의 <회화의 지층 - 환상의 멀티버스 #II>는 그의 <회화의 지층 - 환상의 멀티버스 #I>과 마찬가지로 두 점의 이미지들이 서로 같게 표현되어 있다. 이를테면 두 점의 같은 이미지들이 서로 반대 방향으로 위치되어 있다고 말이다. 따라서 그의 <회화의 지층 - 환상의 멀티버스 #II>과 <회화의 지층 - 환상의 멀티버스 #II>는 우측의 그림을 좌측의 그림 위로 거꾸로 위치시키면 일명 ‘양수리’ 풍경이 된다고 말이다. 물론 그 역도 마찬가지이다.

두말할 것도 없이 이인현의 <회화의 지층 - 환상의 멀티버스 #II>에도 미소한 차이가 있다. 좌측의 그림에는 오른쪽 그림에서 없는 점들이 두 개 찍혀있다. 아마 그 차이는 기다란 막대에 천을 두 겹으로 겹쳐 싸서 찍었기 때문에 발생한 차이일 것 같다. 이를테면 두 겹의 캔버스 천 중에 ‘밑그림’과 직접 닿은 천보다 밖의 천이 미소하게나마 약하게 찍히게 된다고 말이다.

나는 이런저런 추론을 하다가 다음 작품들을 보기 위해 뒤돌아선다. 헉! 두 번째 전시공간에 ‘사건(?)’이 발생한 것이 아닌가. 전시장 벽면에는 이인현의 <회화의 지층 - 환상의 멀티버스> 시리즈가 설치되어 있는 반면, 전시장 바닥에는 검은 석탄들이 비규칙적으로 흩어져 있는 것이 아닌가. 도대체 누가 전시장 바닥에 검은 석탄들을 뿌려놓은 것일까?


이인현_회화의 지층 - 환상의 멀티버스 #III(L’épistémè of Painting - Amazing Multiverse #III)_oil on canvas_10(h)x160(w)x10(d)cm. 2023

일단 전시장 벽면에 설치된 이인현의 신작들인 <회화의 지층 - 환상의 멀티버스> 시리즈를 보도록 하자. 그의 <회화의 지층 - 환상의 멀티버스 #III(L’épistémè of Painting - Amazing Multiverse #III)>(2023)은 <회화의 지층 - 환상의 멀티버스 #II>와 마찬가지로 두 개의 막대형 캔버스에 작업한 작품을 한 벽면에 옆으로 이어붙여 설치한 작품이다. 이 작품도 우측의 그림을 좌측의 그림 위로 거꾸로 위치시키면 일명 ‘양수리’ 풍경이 된다.

물론 이인현의 <회화의 지층 - 환상의 멀티버스 #II>도 기다란 막대에 천을 두 겹으로 겹쳐 싸서 찍은 까닭에 두 그림 사이에 미소한 차이가 있다. 이를테면 두 겹의 캔버스 천 중에 ‘밑그림’과 직접 닿은 천보다 밖의 천이 미소하게나마 약하게 찍히게 된다고 말이다. 따라서 오른쪽 막대형 캔버스에 찍힌 이미지가 왼쪽의 막대형 캔버스에 찍힌 이미지보다 진하다.


이인현_회화의 지층 - 환상의 멀티버스 #IV(L’épistémè of Painting - Amazing Multiverse #IV)_oil on canvas_10(h)x160(w)x10(d)cm. 2023

이인현의 <회화의 지층 - 환상의 멀티버스 #IV(L’épistémè of Painting - Amazing Multiverse #IV)>(2023)은 두 개의 막대형 캔버스에 작업한 것을 위/아래로 설치한 일명 ‘양수리’ 작품이다. 따라서 그들은 마치 거울에 비친 듯 보인다. 그런데 이 작품 역시 기다란 막대에 천을 두 겹으로 겹쳐 싸서 찍은 까닭에 두 그림 사이에 미소한 차이가 있다. 이를테면 아래 그림이 위 그림보다 약간 진하다고 말이다.

이런 단편적인 정보는 이인현의 <회화의 지층 - 환상의 멀티버스 #I>에서부터 <회화의 지층 - 환상의 멀티버스 #IV>까지 작품들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려준다. 그 작품들은 모두 ‘양수리’ 풍경으로 조합할 수 있다. 말하자면 그 작품들은 한결같이 두 개의 마주 보는 벽면에 서로 마주 보도록 설치할 수 있으며, 벽면 모서리에 90도 각도로 설치할 수 있고, 한 벽면에 옆으로 나란히 배치할 수 있다고 말이다.

그렇다면 이인현의 <회화의 지층 - 환상의 멀티버스 #I>은 관객을 작품 안에 위치시키는 작품이 아닌가? 이를테면 관객은 마주 보는 벽면들에 설치된 작품들 사이에 위치한다고 말이다. 관객은 작품 안에서 오른쪽과 왼쪽을 번갈아 가면서 작품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면 관객은 그의 <회화의 지층 - 환상의 멀티버스 #I>을 온전하게 볼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왜냐하면 당신은 그 작품을 한눈에 포착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신은 그 작품을 단지 머리 속에서만 온전하게 그려볼 수 있는 셈이다. 그러면 그것은 관객의 능동적인 참여로 완성되는 것이 아닌가?


이인현_회화의 지층 - 환상의 멀티버스 #V(L’épistémè of Painting - Amazing Multiverse #V)_oil on canvas_10(h)x160(w)x10(d)cm. 2023

자, 마지막으로 이인현의 일명 ‘점’ 작품인 <회화의 지층 - 환상의 멀티버스 #V(L’épistémè of Painting - Amazing Multiverse #V)>(2023)을 보도록 하자. 그것은 직사각형의 캔버스(가로 120cm, 세로 80cm)에 크고 작은 점들을 찍은 작품이다. 물론 이 ‘점’ 작품들도 두께가 10cm이다. 그런데 이 ‘점’ 작품들은 쌍으로 작업한 막대형 캔버스의 작품들과 달리 같은 ‘점’들을 찍은 것 같지 않다고요?

아니다! 이인현의 <회화의 지층 - 환상의 멀티버스 #V>도 마치 한 모체에서 한 번 분만에 두 아이처럼 일종의 ‘쌍둥이(twins)’ 작품이다. 말하자면 그것은 한 ‘밑그림’에서 두 개의 이미지를 동시에 탄생시킨 ‘트윈스’ 작품이라고 말이다. 단지 이 ‘점’ 작품들은 지나가면서 보았던 <회화의 지층 - 환상의 멀티버스>와 달리 의도적으로 다른 작품으로 착각하도록 제작해 놓았다.

우선 이인현은 점들을 찍은 2개의 캔버스 천을 나무틀에 설치할 때 약간 어긋나게 고정시켰다. 만약 당신이 두 그림에 찍힌 점들을 서로 비교해 보면, 왼쪽 그림에 찍힌 점들이 오른쪽 그림에서 볼 경우 오른쪽으로 조금 더 갔고 밑으로도 조금 더 갔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런 까닭에 관객은 두 그림을 다른 그림으로 착각하게 된 것이다.

덧붙여 이인현은 지나가면서 보았던 <회화의 지층 - 환상의 멀티버스>와 달리 의도적으로 점들의 농담과 크기에 차이를 강조해 놓았다. 말하자면 이 ‘점’ 작품도 바닥에 펼친 ‘밑그림’에 천을 두 겹으로 겹쳐서 찍은 까닭에 두 그림 사이에 점들의 농담과 크기에 미소한 차이가 생길 텐데, 그는 그 미소한 차이를 강하게 드러나도록 의도적으로 제작해 놓았다. 따라서 관객은 두 그림을 서로 다른 그림으로 착각하게 된 것이다.

머시라? 왜 이인현은 <회화의 지층> 부제를 ‘환상의 멀티버스(Amazing Multiverse)’라고 작명했느냐고요? 나도 모른다. 뭬야? 당신은 스콧 데릭슨(Scott Derrickson) 감독의 영화 『닥터 스트레인지(Doctor Strange)』(2016)가 떠오른다고요? 불의의 사고로 절망에 빠진 외과의사 ‘닥터 스트레인지’는 에인션트 원을 만나 모든 것을 초월한 최강의 히어로로 거듭난다. 그는 여러 차원의 세계를 넘나들며 현실조작 및 포탈 생성, 유체이탈, 차원 이동, 염력 등 강력한 능력을 지닌다.

6년 만인 2022년 『닥터 스트레인지』의 속편인 샘 레이미(Sam Raimi) 감독의 영화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Doctor Strange in the Multiverse of Madness)』가 개봉되었다. ‘닥터 스트레인지’는 여러 우주가 동시다발적으로 존재한다는 멀티버스에서 ‘스트레인지’와 ‘스트레인지’가 대면하는 1인 다역으로 등장한다.

이제 이인현이 ‘트윈스’ 작품을 ‘환상의 멀티버스’로 부른 이유를 감 잡으셨지요? 말하자면 그의 ‘환상의 멀티버스’는 ‘하나’(uni-)의 우주(Universe)가 아니라 ‘다중(multi)’의 우주((Multiverse)라고 말이다. 그의 ‘트윈스’ 작품은 다중우주에서 만난 <회화의 지층>인 셈이다. 그렇다면 그의 <회화의 지층 - 환상의 멀티버스 #V>에 등장하는 수많은 ‘점’은 ‘어디에서나 한꺼번에 일어나는 것’이 아닌가?

박기원의 ‘환상적인 회화’와 ‘검은 구름(Black Clouds)’

자, 이번에는 박기원의 작품들을 보도록 하자. 이인현의 <회화의 지층 - 환상의 멀티버스> 시리즈를 보고 나면 박기원의 거대한 회화 작품 4점을 만난다. 난 그의 회화 작품들 앞에서 눈이 멀뻔 했다. 왜냐하면 그의 회화 작품들은 눈부시게 빛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연두색, 초록색, 하늘색 등은 원색에 가까운 화려한 계통에 형광빛을 더해 밝은 느낌을 강조한다고 말이다.


박기원_넓이(Width)_한지 위에 유채. 2023

그 눈부신 회화 작품들은 박기원의 <넓이(Width)>(2023) 시리즈이다. 그것은 대형 한지(214x150cm) 위에 유채로 그린 그림이다. 그것은 언 듯 보면 마치 모노크롬 페인팅처럼 보인다. 만약 당신의 그의 ‘넓이’ 시리즈로 한 걸음 더 들어간다면, 단색화가 아닌 기하학적 형태를 표현한 것임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런데 기하학적 형태는 수많은 선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것은 세필로 그려진 선들이다. 따라서 그의 ‘넓이’ 시리즈는 ‘달콤 쌀벌한 회화’라고 할 수 있겠다. 연두색과 초록색 그리고 하늘색 유화물감으로 그려진 선들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그려져 있다. 따라서 선들은 교차하고 중첩된다. 박기원은 ‘넓이’ 시리즈의 비하인드 스토리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2002년 가람화랑에서 천장에 수평으로 투명비닐 설치작업을 전시하며 일부 공간에 색연필로 그린 A4 사이즈 정도의 작은 종이 그림 몇 점을 벽면 위에 부착했었다. 최근 몇 개월 전에 그 그림들이 생각나서 한지 위에 유채로 몇 점을 그리게 되었다.”

2002년 가람화랑에서 열린 박기원 개인전 『수평(水平)』은 관객의 눈에 잘 띄지 않는 천장에 수평으로 낚싯줄들을 팽팽하게 설치하여 그 위에 얇은 투명비닐을 설치한 작품이다. 말하자면 그는 화이트 월과 목조 석까래들의 이질적인 경계에 투명비닐을 개입시켜 일종의 ‘중간지대’를 만들어 놓았다고 말이다. 천장 아래 수평으로 설치된 얇은 투명비닐은 빛(인공조명)과 바람에 의해 가볍게 흔들린다. 그것이 바로 박기원의 설치작품 <수평>이다.

당시 박기원은 전시장에 종이에 연필로 그린 작품들과 색연필로 그린 작품들도 전시해 놓았다. 특히 종이에 연필로 그린 작품은 마치 가람화랑에 설치한 투명비닐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이를테면 그것은 사선들을 겹치게 그려놓아 마치 낚싯줄 위에 올려놓은 비닐의 물결무늬처럼 느껴지게 한다고 말이다. 그렇다면 종이나 색연필로 작업한 그의 <수평>은 가람화랑이라는 특정한 장소와 공간을 2차원의 평면에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박기원_넓이(Width)_한지 위에 유채. 2023

이번 갤러리 R에 전시된 박기원의 신작 <넓이> 시리즈는 대형 한지에 유채로 작업한 4점과 함께 소형 캔버스(41x31.8cm)에 오일스틱으로 그려진 3점이다. 그는 신작 ‘넓이’ 시리즈에 관해 다음과 같은 작가노트를 써 놓았다.

“4월, 봄에 볼 수 있는 자연 속의 연두 초록빛, 그리고 맑고 높은 하늘빛 컬러를 한지 위에 담으려 했다. 캔버스 소품은, 한지 작업과 정반대의 따뜻한 오렌지, 레드, 갈색 색감으로 구성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컬러가 한지와 캔버스 작업에서 느껴지면 좋을 것 같았다.”


박기원_넓이(Width)_캔버스 위에 오일스틱. 2023

박기원의 <넓이> 시리즈에 그려진 사선들은 평면적 선이라기보다 오히려 음악의 선율에 가깝다. 그것은 마치 주름(pli)처럼 보인다. 들뢰즈(Gilles Deleuze)는 그 주름을 사각의 틀로 구성한다. 사각의 틀, 즉 네 가지 주름들(plis)은 다름아닌 들뢰즈의 언술행위(discours)의 조건들이다. 그러면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바로 그 조건들이 아닌가?

하지만 그 조건들은 가변적이다. 그리고 그 조건들의 변화가 환원가능한 것이 아니라 환원 불가능한 것으로 상이한 운율을 지닌 것, 즉 사선으로 나타난다는 점이다. 그러면 그 사선(斜線)은 사시(斜視)의 시각으로 보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사선들은 서로 교차하고 충돌하고 중첩되고 다시 방사할 뿐이다. 때문에 우리는 그 사선들 중에서 어떤 사선이 시원(始原)인지 물을 수 없다. 그렇다! 선들이 주어져 있을 뿐이다. 따라서 나는 단지 선들 사이의 관계를 추적할 뿐이다.

물론 선들 사이의 간격은 단지 국소적인 것이 아니라 국부적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선들은 중첩의 관계로서 작용하고, 그리고 전시장 환경(milieux) 안에서 일정한 간격을 두고 배치된 세 작품 사이에도 힘은 작용한다. 그러면 힘의 작용은 내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외부에 있는 것이란 말인가? 그러나 그 외부는 단지 밖이 아니다. 그것은 깊이를 알 수 없는 외부의 외부에 있는 내부의 외부이기도 하다. 그 특정한(sp cifiaue) 선들은 다양한 층위를 관통하고 횡단하면서 복선의 다이어그램(diagramme)을 그리게 될 것이다.

그 복선의 다이어그램은 서로 엇갈리기도 하고 비켜가기도 하고 교차하기도 할 것이다. 그렇다면 선들은 전략적 지대(zone strat gigne)를 이루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러면 주름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전략적 지대와 가장자리(ligne du dehors) 그리고 지층을 가로질러 나타나게 될 것이다.


박기원_검은 구름_Cloth Ball_가변 크기. 2023

머시라? 내가 이인현의 <회화의 지층 - 환상의 멀티버스> 시리즈 사이에 펼쳐진 크고 작은 동그란 검은 석탄들을 지나친 것 같다고요? 깜빡할 뻔했다. 그런데 그것은 석탄들이 아니라 검정 클로스 볼(Cloth Ball)이다. ‘클로스 볼’ 하면 2014년 소소 갤러리에서 열린 『러브 마이너스 제로(Love Minus Zero)』에 전시된 박기원의 설치작품 <그라운드(Ground)>(2014)가 떠오른다.

박기원의 <그라운드>는 소소 갤러리의 1층 전시장 바닥에 알록달록한 솜뭉치인 클로스 볼들 수천 개로 가득 채운 설치작품이다. 따라서 그의 <그라운드>는 흥미롭게도 어린이 놀이방을 연상케 한다. 따라서 관객은 마치 아이처럼 화려한 컬러의 클로스 볼들이 가득 채워진 곳으로 들어가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관객은 ‘작품을 밟을 수 없다.’ 그렇다! 그것은 일종의 ‘미끼’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위한 ‘미끼’일까? 만약 관객이 전시장 바닥에 수천 개의 컬러 볼들로 가득 찬 것을 직접 본다면, 전시장의 바닥과 벽면들이 완전하게 구분된다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따라서 관객은 이전에 느끼지 못했던 전시공간의 특성을 새삼 보게/알게 된다.

박기원은 2021년 인천 차 스튜디오(CHA studio)에서 열린 박기원 & 이인현 2인전 『박기원이 이인현을 만났을 때』 다시 클로스 볼로 설치작품을 한다. 당시 그는 차 스튜디오 2층 전시장 콘크리트 바닥에 백색 클로스 볼들을 설치해 놓았다. 그는 크고 작은 백색 덩어리들을 가로 4미터에 세로 4미터의 정사각형 바닥에 ‘산종(散種)’시켜 놓았다.

당시는 폭염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한여름이었다. 따라서 백색 클로스 볼들은 마치 하얀 눈송이처럼 보였다. 그렇다! 그 백색 덩어리들은 심리적으로나마 시원함을 선사했다. 관객은 백색 덩어리들의 정체가 궁금한지 손으로 살짝 만져보기도 했다. 관객은 그것이 감촉이 부드럽고 폭신한 쿠션이 있는 클로스 볼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소소 갤러리에서 박기원은 백색의 전시공간과 확연하게 구분되는 알록달록한 클로스 볼들을 사용했다면, 그는 차 스튜디오의 야생적인 공간과 뚜렷하게 구분되는 백색의 클로스 볼들을 설치해 놓았다. 그는 차 스튜디오의 설치작품을 <찬 공기(Cold Air)>(2021)로 작명했다. 찬 공기? <찬 공기>에 대한 박기원의 작가노트를 보도록 하자.

“물거품, 우박, 백색 덩어리, 무게, 솜먼지, 굵은 눈발, 큰 공기, 질량, 허황된 것, 찬바람, 보이지 않는 바람, 바람 소리, 차가운 덩어리, 공기 질량, 차가운 공기의 덩어리를 보듯, 바닥에 모아놓은 공기의 형태들.”

박기원의 작가노트는 설치작품 <찬 공기>만큼이나 구체적이면서도 동시에 시(詩)적이다. 그는 작품을 전시하는 장소나 공간에 주목한다. 따라서 그는 전시공간을 ‘작품을 위한 공간’이라기보다 오히려 ‘공간과 함께 호흡하는 작품’을 지향한다. 따라서 그의 설치작품은 어느 곳에서나 전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특정 공간에서만 가능하다.

박기원은 “이미 만들어진 환경이나 풍경은 그대로 있고, 그 위에 ‘미세한 공기의 흐름’, 팔의 솜털이 움직이듯 한 미세한 바람처럼 어떤 자극도 없어 보이며, 방금 지나친 한 행인의 기억할 수 없는 모습과 같은 최소한의 ‘움직임’을 원한다.”

박기원은 주로 부피감이 적고 가벼운 일상적인 ‘레디-메이드’들로 수작(秀作)들을 제작했다. 쓰레기봉투에 쓰이는 노랑 투명비닐이나 볼펜 심지에 들어있는 얇은 철실 그리고 시트지와 사선 테이프, 얇은 무늬목과 얇은 플라스틱 거울 또한 투명 에어튜브와 클로스 볼 등이 그것이다. 물론 그는 투명 바니쉬(varnish)도 사용했다.

박기원은는 자연의 빛뿐만 아니라 인공조명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는 공기 또한 공기의 흐름인 바람도 차용했다. 그는 주어진 장소에 최소한의 재료들로 장소의 특성을 고려하여 장소와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설치작품들을 제작한다. 그는 이번 갤러리 R의 전시장 바닥에 설치한 클로스 볼 설치작품을 <검은 구름>이라고 작명한다. 검은 구름? <검은 구름>에 관한 박기원의 작가노트를 인용해 보자.

“형태 없는 물질, 아무것도 없는 곳, 무거워진 공기, 장마철 먹구름이 움직인다, 날씨, 검은 구름이 몰려온다. 공기 조각. 나의 관심사 중 하나는 물질감을 최소화한 전시를 생각하는 것이다. 그것은 거의 아무것도 없는 듯한 상황을 연출하는 것인데, 시각적으로는 아무것도 없는 아무것도 아닌 이야기처럼 보일 수도 있다. 검은 구름은 아주 단순한 형태의 물질을 통하여 공기의 움직임만으로 무언가 상상할 수 있는 공간을 구현하려는 계획에서 시작되었다. 잠시, 먹구름 속에 서성이는 관객은 어두운 공기와의 낯선 대면에 어떻게 대응할까,..”

흥미롭게도 박기원이 전시공간을 면밀히 관찰하고 작품화하는 그의 방식이 처음으로 시도된 작품 제목이 <움직임>(1996)이란 점이다. 그는 단단한 벽면에 조명을 장착하고 그 앞에 투명 비닐을 설치해 너머의 공간을 상상케 했다. 그리고 그는 바람을 이용해 작품의 미세한 움직임을 감지하도록 했다. 그는 장소의 부피나 온도나 흐름 등에 주목했다. 그는 한 마디로 ‘살아있는 작품’을 오늘날까지 지속하고 있다. 나는 그 점을 상기한다는 점에서 그의 작품 제목들을 이곳에 나열해 보도록 하겠다.

<부피>(1997), <수포 속으로>(1998), <수평>(2003), <깊이>(2003), <더운 곳>(2004), <감소>(2005), <파멸>(2006), <가벼운 무게>(2006), <넓이>(2007), <진공>(2008), <마찰>(2008), <부유>(2009), <부메랑>(2009), <배경>(2010), <희미한>(2010), <에어월>(2010). <낙하>(2011/2015), <그라운드>(2014), (2013/2015/2017), <정원>(2014), <플래쉬 월>(2014/2016), <온도>(2015), <원경>(2016), <도원경>(2016), <만개>(2016), <물결>(2018), <사색적 허공>(2018), <안개(2018), <연속>(2019), <찬 공기>(2021) 등이 그것이다.

박기원은 1990년 <공(公)을 위한>을 시작으로 오늘날까지 작품의 중심에 관객을 둔 설치작품을 제작하고 있다. 따라서 관객이 부재하는 그의 작품은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왜냐하면 그의 작품은 관객을 만날 때 비로소 완성되기 때문이다. 나는 지나가면서 박기원이 ‘살아있는 작품’을 만들었다고 중얼거렸다.

그러나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살아있는 것은 언젠가 죽음을 맞이한다. 따라서 그의 ‘살아있는 작품’은 일시적일 뿐이다. 그의 ‘살아있는 작품’은 전시를 통해 일시적으로 살다가 전시가 끝나면 사라진다. 따라서 위에 나열한 작품들 모두 지금은 이미지로만 남아있다.

박기원은 주어진 장소와 ‘레디-메이드’들을 통해 예술작품을 제작한다. 그에게 예술작품이란 장소와 재료들을 접목시켜 관객에게 오묘한 ‘감성’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에게 예술작품은 우리의 이성적 한계를 뛰어넘어 타자와 교감하는 접신적 경험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박기원은 자신의 예술작품이 관객에게 오해를 전제하고 오독을 허용한다. 왜냐하면 그는 예술작품에 그러한 ‘폭력적 오독행위’가 허용되지 않는다면 내적 충만함도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박기원은 예술작품을 가능하게 하는 것으로 금기와 위반을 든다. 왜냐하면 그는 ‘표현할 수 없는 것에 침묵하라’는 금기를 위반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그는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야말로 예술작품’이라고 생각한다고 말이다. 따라서 그는 예술작품을 에너지의 소비로, 생명력을 낭비하고 소진해 나가는 것으로 보았던 것 같다. 그런데 죽음까지 불사하는 예술작품은 금기의 위반 없이는 체현할 수 없다는 점이다. 박기원은 금기를 위반함으로써 쾌락을 느낀다. 그렇다면 그에게 예술작품의 최종적 의미는 ‘죽음’에 있는 것이 아닌가?

죽음은 살아있는 인간이 경험할 수 없는 미스터리이다. 하지만 그는 예술작품에 내재한 ‘죽음의 충동’을 간파한다. 따라서 그는 예술작품을 통해 ‘숭고함’과 ‘죽음’으로 다룬다. 물론 그는 지속적인 예술작품을 제작하고 해체시키면서 삶과 죽음을 반복한다. 그렇다면 하나의 작품이 탄생하여 일시적으로 살다가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은 일종의 ‘작은 죽음(petite mort)’이 아닌가? 그는 오늘도 ‘작은 죽음’을 맞이하고, 내일 또 다른 ‘살아있는 작품’을 잉태시키게 될 것이다.

자존심이 강한 두 고수(高手)의 ‘환상적인 명승부’

이인현의 <회화의 지층 - 환상의 멀티버스> 시리즈는 스밈과 번짐 그리고 두께라는 특성을 지닌다. 여기서 말하는 ‘두께’는 캔버스의 ‘측면’을 뜻한다. 이인현은 기존의 회화가 ‘정면의 회화’였다면서 그동안 은폐된 ‘회화의 측면’을 폭로한다. 반면 박기원의 <넓이> 시리즈는 캔버스보다 최소한의 부피감을 지닌 한지를 사용한다. 이인현은 스밈과 번짐을 위해 적잖은 기름(turpentine)을 사용하는 반면, 박기원은 기름기를 쏙 뺀 유화물감으로 한지에 그린다.


이인현_회화의 지층 - 환상의 멀티버스. 2023 / 박기원_검은 구름. 2023

언 듯 보기에 서로 다른 특성을 지닌 박기원과 이인현의 작품은 티격태격하면서도 잘 어울리는 한 쌍으로 보인다. 특히 벽면에 크고 작은 점들로 표현된 이인현의 <회화의 지층 - 환상의 멀티버스 #V>와 전시장 바닥에 검정 클로스 볼들로 설치한 박기원의 <검은 구름>은 일종의 ‘환상적인 커플’로 보인다. 왜냐하면 이인현의 <회화의 지층 - 환상의 멀티버스 #V>에 표현된 크고 작은 점들이 마치 전시장 바닥으로 ‘버스 점프(Verse-jump)’하여 박기원의 검정 클로스 볼들로 전이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물론 역으로 전시장 바닥에 설치된 박기원의 <검은 구름>들이 ‘버스-점프’하여 이인현의 그림으로 들어가 점들로 자리바꿈한 것으로도 열려 있다.

머시라? ‘버스-점프’하면 무엇보다 올해 아카데미를 석권한 다니엘 콴(Daniel Kwan) & 다니엘 쉐이너트(Daniel Scheinert) 감독의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가 떠오른다고요? 중국에서 미국으로 건너간 이민자 애블린은 세탁소를 힘겹게 운영하는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악(惡)과 대결하게 된다. 하지만 그녀는 멀티버스 안에서 수천, 수만의 자신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녀는 악에 맞서기 위해 ‘버스 점프’ 기술을 익혀 다른 차원의 자신이 가진 능력을 내려받는다.

나는 자존심 강한 두 고수(高手)인 박기원과 이인현의 2인전을 백색의 텅 빈 공간 안에 수많은 입자가 있다는 것을 폭로하고자 서로 손을 잡은 전시회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그들의 ‘자강두천’은 자존심 강한 두 고수의 대결이라기보다 차라리 자존심을 버린 두 고수가 서로를 존중하는 전시회인 셈이다. 따라서 나는 환상적인 커플인 그들이 앞으로 어디로 튈지 자뭇 궁금하다.

새로운 미술 출판문화
스마트폰만 있다면 언제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박기원 & 이인현 ‘전자-도록(digital-catalogue)’

출판사 KAR은 이번 갤러리 R의 박기원 & 이인현의 2인전 『자강두천』을 위해 박기원 작가와 이인현 작가의 전작들과 함께 미술평론가 류병학 씨의 작가론을 수록한 박기원의 전자도록 『텅 빈 공간과의 대화』와 이인현의 『회화의 지층』을 발행한다. 출판사 KAR에서 발행한 전자도록은 온라인 서점들(예스24, 교보문고, 알라딘, 리디북스, 밀리의 서재)에서 구매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