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열전

갤러리R 기획전 박정기 개인전 <사기열전(詐欺列傳)>

갤러리R(gallery R)은 지난 2월 5일부터 3월 6일까지 한 달간 개관전 를, 3월 19일 부터 4월 10일까지 류제비 개인전 『꽃과 바람과 별 그리고 소년(FLOWER, WIND, STAR and BOY)』을 개최했습니다. 갤러리R(황영배 대표)은 오는 4월 23일부터 5월 14일까지 박정기 개 인전 『사기열전(詐欺列傳)』을 개최합니다.

박정기 작가는 독일 뮌스터 미대(ACADEMY OF FINE ARTS MEUNSTER)에서 <새로운 슈퍼마켓(Neuer Supermarkt)>으로 새로운 ‘레디-메이드’를 제시했던 기욤 바일(Guillaume Bijl) 교수로부터 마이스터슐러(Meisterschuler)로 사사받고 귀국한 작가입니다.

그는 국내외에서 수차례 개인전을 개최한 바 있습니다. 우선 그가 유학했던 독일에서 개최한 개인전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2009년 독일 뮌스터의 베베어카 파빌리온(Wewerka Pavillon)에서 개인전 『미술관을 위한 미술관(Museum for Museum)』, 2010년 독일 쿤스트 아카데미 뮌스터에서 개인전 『창의적 순간으로써의 멜랑꼴리(Melancholie als kreatives Moment)』, 2013년 독일 뮌스터 아펜가 22번지(Hafenweg 22) 건축물에서 개인전 『극장 아닌 극장(Theater_ Kein Theater)』 등이 그것입니다.

박정기 작가가 독일 유학 생활을 마치고 국내로 귀국해 개최한 개인전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2016년 카이스트(KAIST) 경영대학 리서치 & 아트갤러리(Research & Art Gallery)에서 개인전 『달콤함의 무게(Weight of Sweetness)』, 2017년 봉산문화회관에서 개인전 『헬로 컨템포러리 아트 I_정원(Hello Contemporary Art I_Garden)』, 2018년 대구미술관에서 개인전 『걷다 쉬다(Walk & Rest)』, 2019년 세컨드 에비뉴갤러리의 개인전 『창작의 열쇠』, 2021년 스페이스 자모의 개인전 『창작의 열쇠 - 검독수리』가 그것입니다.

그는 다수의 국내외 그룹전에 초대되었습니다. 그의 주요 그룹전을 들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2010년 독일 알렌(Ahlen)의 쿤스트 뮤지엄의 『란트파티(Landpartie)』, 2011년 벨기에 겐트(Gent)의 『KASK』, 리투아니아의 카우나스 포토그래피 갤러리의 『At Home - on the Road』, 2012년 독일 뒤셀도르프의 『쿤스트푼크테 뒤셀도르프 2012(KUNSTPUNKTE Duesseldorf 2012)』, 구스타브 륍케뮤지엄(Gustav Luebke Museum)의 『Here and Now』, 2013년 국립현대미술관 고양창작스튜디오의 『사건들』, 2015년 문화역 서울284의 『은밀하게 황홀하게』, 울산 『태화강 국제설치미술제』, 2016년 서울시립 북서울시립미술관 『구사구용』, 2017년 뮌헨 국립 독일 박물관의 『에너르기, 벤덴(Energie, wenden)』, 이탈리아 베니스 아르세날(Arsenal in Venedig) 『아르테 라구나 프라이즈(Arte Laguna Art Prize)』, 2019년 청주시립미술관 오창관의 『레디컬 아트(Radical Art)』 등입니다.

박정기 작가는 2017년 국제 아르떼 라구나 프라이즈(Arte Laguna Prize)의 파이널 리스트(Finalist)에 올랐고, 같은 해 대구미술관의 ‘Y+아티스트’에 선정되었습니다. 그의 작품은 독일 전기회사(RWE Deutschland AG)와 청주시립미술관 그리고 개인 컬렉터가 소장하고 있습니다.

박정기 작가는 이번 갤러리R 개인전에 2021년부터 2022년까지 제작한 신작들만 전시합니다. 회화 5점, 사진 4점, 드로잉 5점, 모형 2점, 오브제 1점, 자료들 등 총 17점이 전시됩니다. 박정기 개인전 『사기열전(詐欺列傳)』을 아래와 같이 개최하오니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전시제목 : 사기열전(詐欺列傳)
초대작가 : 박정기

전시작품 : 회화 5점, 사진 4점, 드로잉 5점, 모형 2점, 오브제 1점, 자료들
전시장소
갤러리R(gallery R)
서울특별시 성동구 광나루로 294 성동세무타워 B01호
TEL 02-6495-0001
e-mail galleryrkr@gmail.com
homepage galleryr.kr

전시기간 : 2022년 4월 23일 - 5월 14일
전시기획 : 갤러리 R 객원큐레이터 류병학

Artist Talk 2022년 4월 30일(토) 오후 3시

전시오픈 : 매주 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오픈시간 : 오전 11시부터 오후 7시까지
전시휴관 : 매주 일요일, 월요일사기열전


사기열전

<사기열전>은 원래 영상으로 제작하기 위한 자료 준비작업 과정에서 제작한 드로잉 회화 설치 등으로 만들어진 작품을 <사기열전>이라는 같은 이름으로 전시한다.

‘창작의 열쇠’ 네 번째 이야기인 <사기열전>은 존재하지 않는 상상의 세계를 우리의 눈앞에 드러내 보이는 예술과 사기에 관해 다룬다. 구제적으로 예술의 사회적 역할과 사기 사건 속에 감춰져 있는 사람들의 욕망을 드러내 보인다.

사기와 예술은 기존의 고정관념을 통찰하여 새로운 상상의 세계를 구현해 낸다는 점에서 기본적인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많은 경우 예술가들은 실재하지 않는 사회, 문화, 정치, 종교적 이데올로기들을 현실에 구현해 냄으로써 권력자들의 이익을 강화해 나가는데 기여해 왔다. 어떤 의미에서는 주제적이라기보다는 수동적인 창조행위라고도 볼 수 있다.

현대미술에 들어서면서 예술가들의 주체성과 자율성은 강화되었지만, 자본의 가치가 절대적인 영향력 아래 놓인 예술의 역할은 자본의 모순을 가리거나 미화하는 역할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검은돈을 세탁하거나, 세금을 회피하기 위해, 문화산업이라는 대체 소비재로 전락해가고 있다.

이와 달리 사기꾼은 관념, 종교, 문화, 권력, 법과 질서와 같은 고정관념이 허상임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리고 인간의 욕망의 파고들어 경제적 이익을 추구한다. 인간은 믿고 싶은 것만 믿는다. 사기꾼은 우리가 믿고 싶어하는 세계를 만들어 우리에게 보여준다.

<사기열전>은 사기 수법의 창의적이고 기발한 수법을 보여주려는 것보다는 예술가의 수동적이고 종속적이고 사회적 역할에 대해 문제 제기하며, 사기 사건을 통해 우리의 가려진 욕망의 민낯을 보여주려 한다.

- 박정기 2020


사기열전!?

머시라? 혹 ‘사기열전’이 중국 전한(前漢)의 역사가 사마천(司馬遷)이 저술한 <사기열전(史記列傳)>을 말하는 것이냐고요? 사마천의 <사기열전>은 그의 역사서 『사기(史記)』 중 정수(精髓)로 평가된다. 사마천의 『사기』는 〈본기(本記)〉(12권), 〈표(表)〉(10권), 〈서(書)〉(8권), 〈세가(世家)〉(30권), 〈열전(列傳)〉(70권) 등 130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사마천의 <열전>은 『사기』의 반 이상을 차지하는 방대한 분량이다. 그의 <열전>은 옛 신화시대부터 자신이 살았던 한무제(漢武帝) 때까지 격동기를 살다간 다양한 인간상과 인간관계를 통해 인간의 본질을 다룬 일종의 ‘전기(傳記)’이다. 이를테면 그의 <열전>은 고대 중국의 문호, 학자, 정치가, 군인, 자객, 협객, 해학가, 관리인, 실업가, 서민 등 일세를 풍미했던 인물들의 일화를 서술한 것이라고 말이다.

그런데 박정기의 『사기열전』은 사마천의 <사기열전(史記列傳)>이 아니라 ‘사기열전(詐欺列傳)’이다. 따라서 박정기의 ‘사기열전’은 다양한 사기꾼의 사기행각을 예술적으로 다룬 일종의 ‘작품’이다. 이번 갤러리 R 박정기 개인전에 전시될 『사기열전』은 다음과 같다.

1820년 그레고어 맥그레거(Gregor MacGregor)의 가상국가 ‘포야이스(poyais)’ 사기 사건을 다룬 <포야이스>, 대한민국에서 벌어진 화폐 사기 사건들인 <2009-001423 블랙머니>, <2011-010143 그린머니>, <2013-014207 화이트머니>(2022) 그리고 <풍선> 시리즈 또한 <더 페인팅(The painting)>이 그것이다.



박정기_사기열전. 갤러리 R. 2022

포야이스(poyais)

박정기의 <포야이스>는 마치 녹십자(Green Cross) 마크처럼 보이는 국기와 카페트 그리고 각종 자료들을 인쇄한 사진들로 연출한 일종의 ‘설치작품’이다. 그런데 사진들 중에는 인물 사진도 하나 있다. 그 인물사진은 다름아닌 스코틀랜드인 그레고어 맥그레거(Gregor MacGregor) 초상화이다. 초상화 옆에는 지도가 위치해 있다. 흥미롭게도 지도의 온두라스 부근에 빨강 핀이 박혀있다. 그리고 박정기는 지도 옆에 아름다운 항구를 그린 풍경화를 전시해 놓았다. 또한 그는 풍경화 옆에 토지 증명서와 화폐 그리고 정부 문서들을 십자형의 표식으로 설치해 놓았다.

머시라? ‘포야이스’가 무엇이냐고요? ‘포야이스’는 그레고어 맥그레거가 가상으로 만들어낸 국가 이름이다. 그가 가상으로 만든 포야이스는 베네수엘라 독립 전쟁에 용병으로 참전하여 지역 토호들로부터 받은 땅이었다. 그 땅은 말라리아가 들끊어 사람이 살 수 없는 늪지였다. 그는 그 땅에 가상의 포야이스 나라를 세운 것이다. 그는 영국인들에게 이 가상의 나라를 마치 진짜처럼 속이기 위해 355쪽에 달하는 포야이스 안내서를 만들었다.

카브리해 연안에 위치한 포야이스 나라는 온화한 날씨가 1년 내내 지속된다. 그리고 포야이스는 각종 농작물을 생산할 수 있는 비옥한 땅을 가졌다. 포야이스는 사냥감도 풍부해 하루만 사냥해도 온 가족이 일주일 동안 먹을 수 있다. 또한 포야이스의 수도인 세인트 조셉은 번성한 해변 도시로 유럽식 극장과 오페라 하우스뿐만 아니라 대성당도 있다. 포야이스에서 부족한 것은 단 하나, 풍부한 자원을 개발할 투자자와 이주민이다.



박정기_사기열전. 갤러리 R. 2022

1820년대 영국은 산업혁명으로 돈이 넘쳤다. 따라서 당시 영국 투자자들은 해외 투자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 점에 주목한 그레고어 맥그리거는 자신을 니카라과-온두라스 일대에 있는 포야이스 나라의 왕(Cazique)으로 소개한다. 그는 포야이스의 국채를 영국인들에게 판매하기 위해 포야이스의 풍요한 환경뿐만 아니라 포야이스의 정치와 문화 그리고 은행 및 상업 또한 군대에 대해서도 언급해 놓은 안내서도 만들었다.

그레고어 맥그리거는 포야이스 안내서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런던과 에딘버러 그리고 글래스고에 포야이스 정부 사무소를 개설했다. 그리고 그는 포야이스 지폐 및 정부 관련 문서도 만들어 인쇄했다. 심지어 그는 포야이스에 관한 노래까지 만들어 영국 주요 도시 거리에서 연주하게 했다. 결국 그의 사기는 통했다. 포야이스의 국채가 순식간에 팔려 나갔던 것이다. 국채에는 시티 오브 런던의 은행(Sir John Perring, Shaw, Barber & co.)의 지급 보증서가 붙어 있었다. 그는 포야이스의 토지 증서와 지폐까지 팔았다.

200여명의 영국인들은 포야이스의 안내서를 보고 이민을 신청했다. 그들은 2개월간 항해 끝에 포야이스에 도착했다. 하지만 그들이 도착한 곳은 풍요로운 포야이스가 아니라 황무지였다. 그들은 원주민의 약탈과 풍토병에 시달려 결국 근처 영국 식민지인 벨리즈(Belize)로 탈출했다. 그러나 그들은 굶주림과 열병으로 50여명만 살아서 귀국할 수 있었다. 이 사실이 영국 언론에 보도되어 맥그리거의 포야이스는 사기로 밝혀졌다.



박정기_포야이스(부분). 2022

블랙머니 / 그린머니 / 화이트머니

박정기의 <2009-001423 블랙머니>(2022)는 캔버스에 검정 아크릴 물감으로 일종의 ‘검은 사각형(Black Square)’을 그린 그림이다. 그리고 그의 <2011-010143 그린머니>(2022)는 백색 캔버스 바탕에 녹색 아크릴 물감으로 마치 ‘녹십자 마크’처럼 십자형을 그린 그림이다. 의 <2013-014207 화이트머니>(2022)는 백색 캔버스 바탕에 백색 아크릴 물감으로 ‘백색 위의 백색(White On White)’을 그린 그림이다.

머시라? 박정기의 ‘머니’ 시리즈가 카지미르 말레비치(Kazimir Severinovich Malevich)의 ‘절대주의 회화(Suprematist Painting)’를 연상시킨다고요? 1915년 말레비치는 러시아 페트로그라드(Petrograd)에서 개최된 『0-10, 마지막 미래주의 회화전』에 절대주의 회화들을 전시하고 미술의 영도(零度)를 선언했다. 그의 육성을 직접 들어보자.

“나는 자신을 제로(Zeoro)의 형태로 만들었고 무(無)에서 창조로 나아갔다. 그것이 절대주의고, 회화의 새로운 리얼리즘이고 – 비(非)-대상적 창조로 나아갔다.(I transformed myself in the zero of form and emerged from nothing to creation, that is, to Suprematism, to the new realism in painting - to non-objective creation.)”

말레비치의 절대주의는 기존의 미술과 결별하고 새로운 미술의 시작을 알린다. 이를테면 그는 자연을 모방하거나 재현하는 미술과 결별하고 비-대상적인 미술을 지향한다고 말이다. 그는 그것을 새로운 리얼리즘으로 부른다. 그것은 자연을 재현한 것도 아니고 자연으로부터 추상한 것도 아니다. 따라서 당신은 그의 절대주의 회화에서 어떤 자연도 유추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의 절대주의 회화는 ‘순수한 감각’으로 표현된 것이기 때문이다.


박정기_2009-001423 블랙머니_캔버스, 아크릴_800×800mm, 2022

네? 그런데 박정기의 ‘머니’ 시리즈는 ‘순수한 감각’으로만 표현된 회화가 아니라고요? 만약 당신이 그의 <2009-001423 블랙머니>로 한 걸음 들어간다면, ‘검정 사각형’ 안에 달러 지폐들을 보게 될 것이다. 그렇다! 그것은 달러 지폐들을 캔버스 부착시킨 다음 그 위에 검정 아크릴 물감으로 칠한 것이다.

와이? 왜 박정기는 캔버스에 달러 지폐들을 부착한 다음 검정 물감으로 은폐하고자 한 것일까? 그 답은 제목의 일련번호(2009-001423)에서 찾을 수 있다. 그 일련번호는 마치 사건번호처럼 느껴진다. 지난 2019년 11월 10일 블랙머니 사기로 적발된 라이베리아인 3명이 구속되었다. 블랙머니 사기는 '먹지 상태의 블랙머니를 특수 약품에 담그면 현금으로 변한다'는 사기를 뜻한다.

당시 언론 보도에 따르면 2019년 11월에만 3건의 블랙머니 사기가 적발되었단다. 사기꾼들은 나이지리아 전 대통령의 비자금 500만 달러를 블랙머니 형태로 가지고 있다면서 미리 검게 만들어 놓은 100달러 지폐를 약품 처리해 마치 진짜 달러로 변하는 것처럼 속여 피해자들에게 ‘약품만 있으면 블랙머니를 당장 현금화할 수 있다’고 유혹했다.

그렇다면 박정기의 ‘머니’ 시리즈는 절대주의 회화로 돈의 실체를 숨기려는 수법을 교차시킨 것이란 말인가? 물론 그의 ‘머니’ 시리즈는 돈을 완전하게 은폐하지는 않는다. 그러면 그의 ‘머니’ 시리즈는 현실과 가상을 접목시킨 작품이란 말인가? 그의 ‘머니’ 시리즈는 진짜 돈과 진짜 회화(절대주의 회화) 사이에서 놀이한다.


박정기_2011-010143 그린머니_캔버스, 아크릴_800×800mm, 2022

‘풍선’ 시리즈

박정기의 <풍선>(2022) 시리즈는 그린과 핑크 그리고 블루와 옐로 풍선으로 독일의 ‘하켄크로이츠(Hakenkreuz)’ 심볼로 만들어 사진으로 촬영한 사진작품이다. 아니다! 그것은 진짜 풍선으로 나치 마크를 만든 것이 아니라 컴퓨터로 작업한 것을 디지털 프린트한 것이다. 머시라? ‘풍선’ 제작과정을 좀 더 구체적으로 언급해 달라고요? 작가의 육성을 직접 들어보자.

“일명 ‘풍선’ 작업은 독일회사 맥슨(Maxon)이 개발한 3D 모델링 및 렌더링, 애니메이션 소프트웨어인 ‘시네마 4D(Cinema 4D)’라는 프로그램을 사용했습니다. 작업과정은 일반 조형물 제작과정과 같습니다. 시네마 4D에서 형태를 모델링 - 시네마 4D 안에 있는 옥테인 렌더러(Octane Renderer)에서 재질을 입히고 렌더링 - 조명과 카메라 설치해서 이미지를 출력하는 과정을 거쳤습니다.”

따라서 박정기의 ‘풍선’은 일종의 ‘디지털 풍선’인 셈이다. 박정기는 ‘디지털 풍선’을 하켄크로이츠 문양으로 만들어 놓았다. 하켄크로이츠는 독일어로 ‘갈고리(Hooks)’를 뜻하는 ‘하켄(Haken)’과 ‘십자가(Cross)’를 뜻하는 ‘크로이츠(kreuz)’를 접목시킨 용어로 ‘갈고리 십자가’를 뜻한다. 불교나 절[寺]의 상징으로 널리 쓰이는 ‘만(卍)’자 모양을 뒤집어 기울여 놓은 모양인 데, 독일 나치즘(Nazism)의 상징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나치 문양의 컬러는 그린도 아니고, 핑크도 아니고, 블루도 아니고, 옐로도 아닌 레드이다. 와이? 왜 박정기는 ‘나치 풍선’의 컬러를 레드로 표현하지 않은 것일까? 혹 그는 ‘나치 풍선’의 변신을 암시하고자 하는 것이란 말인가? 네? 왜 작가는 ‘나치’ 문양을 풍선으로 표현해 놓았느냐고요?


박정기_‘풍선’ 시리즈_디지털 프린트_각각 1189×841mm. 2022

박정기의 ‘나치 풍선’은 제프 쿤스(Jeff Koons)의 일명 ‘풍선 개(Ballon Dog)’ 시리즈가 떠오른다. 그러고 보니 그의 ‘풍선 개’는 그린과 핑크 그리고 블루 또한 옐로뿐만 아니라 레드로도 만들어졌다. 그의 ‘풍선 개’는 마치 파티용 풍선을 꼬아 만든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무거운 스테인리스 스틸로 제작된 것이다. 물론 그는 스틸에 크롬도색 유리막 코팅을 하여 마치 가볍고 미끈한 ‘풍선-조각’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따라서 관객이 그의 ‘풍선 개’ 앞에 서면 거울처럼 관객의 모습을 비춘다.

지난 2013년 크리스티 경매에서 제프 쿤스의 '풍선 개'는 5840만 달러(약 650억원)에 낙찰되었다. 당시 그는 생존 작가로서 최고의 낙찰가를 기록하여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따라서 혹자는 그를 자본주의 미술의 대명사로 간주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박정기의 ‘나치 풍선’은 자본주의와 전체주의 사이에서 놀이하는 것이 아닌가?


박정기_풍선(핑크)_디지털 프린트_1189×841mm. 2022

The Painting

박정기의 <더 페인팅(The Painting)>(2022)은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거대한 미색의 한지를 벽면에 자석들로 설치해 놓은 작품이다. 머시라? 정말 한지에 아무것도 안 그렸느냐고요? 그렇다! 혹시 한지 어느 구석에 연필로 희미하게나마 낙서를 한 곳도 없느냐고요? 없다!
뭬야? 어떻게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날 것의 한지가 ‘회화(The Painting)’냐고요? 어떻게 공장에서 생산된 한지 그 자체가 ‘작품’이 될 수 있느냐고요? 그러면 내가 당신에게 묻겠다. 뒤샹은 공장에서 대량생산된 ‘소변기’를 <샘>으로 명명했다. 뒤샹의 <샘>은 당신에게 작품인가, 작품이 아닌가?

네? 박정기의 <더 페인팅>이 마치 말레비치의 ‘절대회화’를 극한까지 밀고 간 작품으로 보인다고요? 지나가면서 보았듯이 말레비치의 <검정 사각형>은 캔버스에 물감으로 제목 그대로 검정 사각형을 그린 그림이다. 그것은 어떤 상징도 아니고, 기하학도 아니며, 도안도 아니다. 그것은 내면의 질서를 따라 스스로 형성된 '자연을 초월한 순수한 감각'의 표현이다.
따라서 ‘순수한 감각’이 바로 말레비치에게 '절대'인 셈이다.

문득 1950년대 중반 프랭크 스텔라(Frank Stella)가 작업한 <블랙 페인팅(Black painting)>가 떠오른다. 그것은 일명 ‘줄무늬 그림(striped painting)’으로 불린다. 그의 ‘줄무늬 그림’은 캔버스의 사각 형태를 따라 화면 내부로 반복해 그려진 것이다. 따라서 그의 ‘줄무늬 그림’은 회화의 평면성을 따른다. 칼 앙드레(Carl Andre)는 스텔라의 <검정 회화>에 대해 다음과 같이 아름답게 해석했다.


박정기_The painting_한지_1500×2100mm. 2022

“프랭크 스텔라의 그림은 상징적이지 않다. 그의 띠들은 붓이 캔버스 위를 지나간 길이다. 이 길은 오직 회화로 통한다.”

추상미술은 흔히 현실세계와 동떨어진 것으로 간주되었지만, 추상미술은 사실상 현실세계와 통합되기를 원했다(기보다 차라리 ‘현실세계 되기’를 원했다고 말하는 것이 더 타당할 것 같다. 왜냐하면 추상미술은 재현주의를 넘어 하나의 ‘구체적인 사물이 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점에서 추상미술은 미술의 성향 혹은 미술사의 사조라기보다 오히려 ‘사는 방식’이라고 말하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그렇다면 박정기의 <더 페인팅>은 ‘구체적인 사물/회화 되기’를 시도한 것이 아닐까? 그런데 그는 자신의 <더 페인팅>을 오쇼 라즈니쉬(Osho Rajneesh)의 저서 『내가 사랑한 책들(Books I Have Loved)』에 나오는 수피(Sufi)의 책 <더 북(The Book)>과 연관되어 있다고 진술한다. 그런데 수피들이 대물림하여 연구해오던 <더 북>은 아무런 글도 없는 책이란다. 라즈니쉬는 글도 없는 <더 북>을 읽고 우리에게 11번째 책으로 추천했다.

물론 수피의 <더 북>은 사점에서 구입할 수 없는 책이다. 따라서 박정기는 <더 북>을 읽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라즈니쉬가 소개한 <더 북>을 상상한다. 그는 <더 북>의 깊이를 헤아릴 길이 없지만,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는 방향성의 전환을 유추해 보았다. 아무런 글도 없다는 텅 빈 <더 북>은 그에게 충만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그는 아무것도 그리지 않은 텅 빈 한지를 ‘더 페인팅’으로 전시해 놓았다.

물론 박정기는 텅 빈 <더 페인팅>이 관객에게 충만함을 줄 수 있기를 기대할 것이다. 혹자는 그의 <더 페인팅>을 보면서 ‘시작’을 떠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당신은 그의 <더 페인팅>을 보면서 ‘탄생’을 상상할지도 모르겠다. 머시라? 자기는 그의 <더 페인팅>을 보면서 ‘침묵’을 하게 된다고요? 그렇다! 우리는 그의 <더 페인팅>을 보면서 각자 다른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더 페인팅>은 단순히 텅 빈 것이 아니라 오히려 충만한 것이 아닌가? 이를테면 그의 <더 페인팅>은 다양한 이미지로 열려있다고 말이다. 그러면 그는 '고등사기꾼(mental-gamer)'이 아닌가?

새로운 미술 출판문화
스마트폰만 있다면 언제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박정기 ‘전자-도록(digital-catalogue)’

출판사 KAR은 작년 12월부터 올해 초까지 한글판 전자도록을 총 19권 발행하였습니다. 출판사 KAR의 16권 전자도록들은 그동안 미술평론가 류병학 씨가 집필한 14명 작가(김태헌, 김해민, 류제비, 박기원, 손부남, 손현수, 안시형, 이기본, 이유미, 이현무, 장지아, 하봉호, 허구영, 홍명섭)의 작가론들과 일부 작가들이 직접 집필한 일종의 ‘전자_아트북(Digital_Art Book)’이다.

출판사 KAR은 미술계에 새로운 출판문화를 선도하고자 합니다. 미술평론가 류병학 씨는 “‘전자-도록’의 도래는 출판문화의 변화를 넘어 질적인 미술계를 조성하는데 기여하게 될 것”으로 내다보았습니다.

출판사 KAR은 이번 갤러리 R의 박정기 개인전 『사기열전(詐欺列傳)』을 위해 박정기 작가의 전작들과 함께 미술평론가 류병학 씨의 ‘박정기론’을 수록한 전자도록 『창작의 열쇠』를 발행합니다. 출판사 KAR에서 발행한 전자도록은 온라인 서점들(예스24, 교보문고, 알라딘, 밀리의 서재)에서 구매 가능합니다.

창작의 열쇠
저자 : 박정기 류병학
출판사 : 케이에이알
발행일 : 2022년 4월 22일